영성

[사회교리 아카데미]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명백한 불법’

양운기 수사 (한국순교복자수도회)rn한국순교복자수도회 소속.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상임위
입력일 2017-08-14 수정일 2017-08-14 발행일 2017-08-20 제 3058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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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창작은 인간생활을 향상시키고 삶을 관조(觀照)케 합니다
창작활동을 이념의 잣대로 막아선 안 돼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지금부터 47년 전, 1970년 8월에 첫 음반이 나왔고 김민기가 적고 양희은의 소리로 세상에 알려진 ‘아침이슬’의 일부입니다. 혼자 흥얼거리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여럿이 저항과 연대를 다짐하며 부르기에 안정감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적용해도 좋은 시(詩)적이며 현실에 대한 위로입니다. 어떤 시련 앞에 주체적으로 자신을 격려하며 굳은 결의를 다지는 의미까지, 많은 사람들이 애창할 수밖에 없는 탁월함이 있습니다.

이 노래에 나오는 “광야”라는 단어는 ‘세상을 도피하고 등진 것이 아니라 더 뜨겁게 세상을 사랑하려 이집트나 알렉산드리아의 사막과 광야로 나가 처절히 수행했던 4세기 전후의 초기교회의 수도자들’을 기억하며 삶을 자극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제가 이 노래를 부를 땐 그들이 왜 광야와 사막으로 나갔는지 자각케 되고 세상과 교회, 그리고 거기 살아가는 인간들을 위해 사막과 광야에서 하느님께 온몸으로 탄원했던 초기 수도자들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내 자신과 이웃, 그리고 삶과 역사를 관조(觀照·contemplation)하게 되고 과거와 현재의 순간을 영원으로 끌어올리고 미래에 투신하는 용기와 신비를 체험합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1975년 말, 박정희 권력이 금지곡으로 지정하면서 부르기만 해도 붙잡혀갔습니다. 노랫말에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라는 부분이 김일성이 떠오르는 걸 암시한다는 억지였습니다. 어디 이뿐인가요? 예술 창작 분야의 자유를 통제하고 혹독한 탄압이 이어지며 권력은 미친 듯 세상을 휘젓다가 제 부하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40년이 지나 그와 닮은꼴이 지난 4년 우리 주변을 휘저었습니다. 이른바 박근혜 정부에 동의하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의 리스트 만들어 창작 지원을 중단하는 불법적인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에 대해 1심 재판부가 지난 7월 27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이른바 ‘블랙리스트’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예술, 창작자들에게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고 예술 활동을 통제한 것이 무죄라니요? 창작활동을 이념의 잣대로 막으면 수치스런 문화수준입니다. 그것은 창작을 통해 인간이 희로애락을 표현하며 자신과 세계를 완성시키는 문예 창작을 방해한 창조적이며 반역적 범죄입니다.

이미 「사목헌장」 62항은 ‘예술은 인간 본연의 자질과,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완성시키는 데에 요구되는 인간의 과제(課題)와 체험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며, 인간의 불행과 기쁨, 필요와 능력을 밝혀주며, 인간의 보다 나은 운명을 개척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교회 생활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문예(文藝)는 시대와 지역(地域)을 따라 여러 모양으로 표현된 인간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는 40년 전의 치욕과 반역의 역사가 반복되지 말아야 합니다. 제발 ‘서러움 모두 버리고~,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우는 일’을 막지 마십시오. 고요한 새벽,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을 보며 세상과 그분을 관조하는 기쁨을 빼앗지 마십시오.

양운기 수사 (한국순교복자수도회)rn한국순교복자수도회 소속.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상임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