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신앙생활도 속도가 아니라 방향! / 노성호 신부

노성호 신부 (용인대리구 양평본당 주임)
입력일 2017-08-14 수정일 2017-08-14 발행일 2017-08-20 제 3058호 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서늘하지도, 후텁지근하지도 않은 날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제작자 미상의 감미로운 향수를 끊임없이 뿌려대는 듯 온 대기는 기분 좋은 향기로 가득 덮여있었지요.

멀리서 들려오는 동면(冬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의 울음이 천상의 하모니로 들리고,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이 마음 속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바로 그때는 어느 봄날의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봄밤의 정취를 만끽하기까지는 ‘서둘지 말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작용해야 했습니다. 자칫 서둘렀더라면 그 자체로 끝이 났을 수도 있었던 지난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교목신부로 사목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학생들에게 ‘클라인 바움’의 소설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라고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을 갖지 말고 간단히 본인의 느낌과 감상평을 써서 제출하도록 요구했지요. 단 표절이나 인터넷을 통한 도용은 금한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출 시한이 되었을 때 학생들의 과제를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너무 잘 쓴 것입니다. 헬렌켈러를 가르쳤던 앤 설리반과 같은 스승이 되고 싶다는 학생도 있었고, 그 소설의 명대사인 ‘Carpe Diem!’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보인 학생들도 다수였습니다. 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요. 과제를 부여하길 잘 했고, 학생들에게 양서(良書)를 소개해 준 듯해 만족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입니까? 학생들의 과제를 읽어갈수록 이상하게 앞에서 읽었던 것들과 대동소이한 것입니다. 심지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글을 써서 제출한 같은 반 학생들도 있었다는 사실!

억장이 무너졌지요. 학생들에 대한 신뢰감 또한 와장창 깨지고 말았습니다. 선생을 속여 넘겼다는, 그리고 선생은 속았다는 사실에 얼마나 큰 냉소를 흘렸을지 생각하니 괘씸하고 억울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때의 조바심과 과잉된 감정이 좀 누그러지더군요. 어떻게 보면 감상문을 쓴다기보다는 숙제를 제출하는 것이 더 급급했을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결국 무엇인가를 빨리 바꿔보려고 했던, 좋은 결과를 단시간 내에 얻어 보려고 했던 저의 ‘서두르는 마음’이 저를 혼란케 했고, 학생들과의 관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을 뻔했음을 깨닫게 되었지요.

빨리 꽃이 피길 바란다고 해서 갑자기 꽃이 만개할 일도, 어서 햅쌀밥을 먹었으면 한다고 해서 이제 막 못자리에서 싹을 틔운 벼이삭들이 쌀을 내놓을 일도 없는 것을 괜스레 애타는 마음 부여잡으며 서두르고, 이런저런 일에 마음을 빼앗기며 홀로 방황하고 힘들어했던 것은 아닌지 성찰하게 되었답니다.

교우 여러분, 그러니 좀 천천히 가보는 것은 어떨까요?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잖아요? 조바심과 욕심, 과오를 참지 못하고 경솔히 지적하며 문제 삼으려 하는 오만(傲慢)이 우리들 사이를 힘들게 하거나 갈라놓는 일이 참으로 많은 것 같아요. 우리 모두는 신앙의 여정 안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지요. 그러니 서로를 보듬고 다독이면서 모두가 천천히 바뀌고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마음을 써 주는 것은 어떨까요? 이제는 서둘지도, 욕심내지도,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았으면 좋겠네요.

노성호 신부 (용인대리구 양평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