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조숙(베드로)·복녀 권천례(데레사) 부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8-14 수정일 2017-08-14 발행일 2017-08-20 제 3058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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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동정부부로 살다 같은 날 순교로 믿음 증거
기도뿐 아니라 단식·자선에도 앞장
2년 넘는 옥살이 끝에 같은 날 참수

양근성지에 있는 복자 조숙(베드로)·복녀 권천례(데레사) 부부의 동상.

조숙(베드로) 복자와 권천례(데레사) 복녀는 부부의 연을 맺었으면서도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며 동정을 지키며 신앙생활을 하다 순교로 믿음을 증거한 순교자다.

1786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난 복자는 1801년 신유박해로 조부와 숙부를 잃고 강원도에 있는 외가로 피신해 생활했다. 복자는 친절하고 침착한 성품이었지만, 박해로 어려움을 겪고 교리를 배우지 못해 신앙생활에는 냉담했다.

복자가 이런 냉담한 생활에서 극적으로 회심하게 된 계기는 복녀와의 혼인이다. 복녀는 혼인한 첫날 복자에게 “함께 정결을 지키며 살자”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건넸다.

복자와 같은 양근 출신으로 권일신(프란치스코하비에르)의 딸이자 신유박해의 순교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인 복녀는 6살에 모친을 여의고, 1791년 신해박해로 부친까지 잃고 자랐다. 세례를 받으면서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했지만, 복녀의 처지를 걱정한 친척들의 권유로 21세에 복자와 결혼하게 됐던 것이다.

‘동정을 지키자’는 것은 복자에게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복자는 즉시 복녀의 뜻을 받아들였다. 복자가 받아들인 것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동정만을 지키는 생활이 아니었다. 부부는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봉헌하는 삶을 실천해나가기 시작했다. 혼인 전까지 냉담했던 복자는 복녀와 함께 기도와 복음선포, 그리고 절제와 극기를 실천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자선 실천을 빠뜨리지 않았고, 주 2회 단식을 실천했다.

부부는 자기 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위해 온 정성을 기울였다. 때때로 남녀의 정에 이끌리는 유혹을 겪기도 했지만, 부부는 이 유혹을 이겨내고 15년에 걸쳐 동정부부의 삶을 살았다. 부부의 모습은 주변 신자들의 모범이 됐다.

부부는 자신의 성화에 그치지 않고 교회를 위한 활동에도 헌신했다. 특히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중국을 드나들던 정하상(바오로)을 뒷바라지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정하상은 교회의 일을 위해 떠나있지 않을 때는 한양에 있는 부부의 집에 머물렀다. 또 부부는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죽음에 처한 어린이에게 대세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1817년 3월 부부는 포졸들에게 붙잡히게 된다. 포졸이 우연히 복자의 첨례표를 발견했던 것이다. 포졸은 복자만을 체포하러 왔지만, 복녀도 포도청의 옥까지 복자를 따라나섰다. 관장은 부부에게 배교하고 동료들을 밀고하라고 강요했지만, 부부는 모든 형벌을 다 받고도 입을 열지 않았다.

부부의 옥살이는 2년이 넘는 긴 시간 이어졌다. 옥살이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복녀는 때때로 마음이 약해지는 복자에게 용기를 주고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길 인내로 기다렸다. 복자는 옥중에서 쓴 서한을 통해 “내가 들어선 이 길은 나로 하여금 예수와 마리아의 계획하심을 누리게 할 목적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라고 전했고, 복녀는 “나 같은 죄 많은 여자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미 동정을 지킬 수 있는 너무나 크나큰 은총을 허락하여 주셨는데, 또 이렇게 나를 순교의 은총에 불러주신다”면서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를 올렸다. 마침내 1819년 8월 10일 복자는 33세, 복녀는 36세의 나이에 참수를 당했다.

■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양근성지

양근성지(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물안개공원길 37)가 위치한 양근 지역은 복자와 복녀가 태어나 신앙을 키워나간 곳이다. 성지에는 이숙자 수녀가 제작한 복자와 복녀 동정순교부부상이 세워져 있다.

※문의 031-775-3357 양근성지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