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장 토마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8-08 수정일 2017-08-09 발행일 2017-08-13 제 3057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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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에게 ‘착한 사람’이라 불리던 참 신앙인
육촌 형제인 장주기 성인과 함께 입교
배티에 정착해 살다 참수형으로 순교

복자 장 토마스 초상화.

장 토마스 복자는 평소 ‘착한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선량한 삶을 살면서도, 박해에는 흔들림 없이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다.

복자는 1815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났다. 복자의 고향 느지지는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교우촌이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복자는 육촌 형제인 장주기(요셉)와 함께 천주교에 입교했다.

함께 입교한 이들은 계명을 지키고 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산골 이곳저곳으로 여러 차례 이사하고, 또 교회의 일을 도우며 살았다. 그러던 중 장주기는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복자는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했다. 당시 배티에는 복자의 친척으로 추정되는 장(시몬)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복자의 가까운 인척과 친구들은 복자에 관해 말할 때 언제나 ‘착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복자의 본심이 순량하고 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복자는 자신 역시 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뿐인 아들도 하느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리를 가르쳤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됐다. 복자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됐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았다. 오로지 주님의 뜻에만 의지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포졸들이 복자의 집으로 들이닥쳐 복자와 복자의 가족들을 모두 체포했다.

복자는 진천 관아에 압송돼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관장은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의 세간을 돌려주겠다”면서 복자를 회유했다. 하지만 복자는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청주로 이송돼 문초와 형벌을 받을 때에도 복자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복자는 “천주교를 배반하라”는 영장의 말에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대답하면서 순교를 각오했다.

사형을 선고받은 복자는 사형이 집행되던 날, 죽음 앞에서 배교하려는 대자에게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믿고 받들다가,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하느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느냐”고 권면하기도 했다.

이후 복자는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요당리성지

요당리성지 성당 외부 전경.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요당리성지(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길 155)는 복자가 태어나고 신앙을 키워간 터전이다. 성지에는 성인의 묘역과 성당,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의 길 등이 조성돼 있다.

※문의 031-353-9611 요당리성지,www.yodangshrine.kr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