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파스카의 삶과 심리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
입력일 2017-08-08 수정일 2017-08-08 발행일 2017-08-13 제 3057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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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으로 가는 길, 내 마음부터 먼저 살피자
"몸과 마음, 영 세 차원이 어우러지는 파스카 삶 돼야"

찬미 예수님.

더운 날씨에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오랜 가뭄에 목말랐었고, 많은 비에 피해도 많았던 시간들을 지나 이제는 습한 날씨와 내리쬐는 태양 볕으로 힘들게 지내는 때입니다. 그래도, 각자마다 다르겠지만, 제 경우는 작년 여름이 더 힘들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보내는 첫여름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참 대단했지요. 제 방이 5층 꼭대기에 남향이어서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실에서 자야 했고, 내내 더위와 싸우는 통에 어떻게 지냈는지도 모르게 보내버린 여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올해는 훨씬 나은 편입니다. 아직까지는 계속해서 방에서 잘 수 있으니까요.

제 방에서 나와 반 층을 올라가면 명상의 방이라는 기도방이 나옵니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도록 성체를 모셔 놓은 널찍한 온돌방이죠. 위치적으로 제 방에서 보면 성당보다도 훨씬 가깝고 또 아늑한 분위기여서 기도하러 가기에는 딱 좋은 곳입니다. 더구나 학생들이 없는 방학 기간이기에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죠. 그래서 늘 방학 때가 되면, 성무일도도 명상의 방에 가서 하고 성체조배도 자주 해야겠다 마음먹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더위입니다. 아무리 작년보다 덜하게 느껴지는 올여름 더위라지만 명상의 방에 가서 성체 앞에 앉아있을라 치면 시원한 방을 떠나기 싫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기 때문입니다. 성체 앞에 머물러 있고픈 마음도 있지만, 더운 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제 안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눅눅함을 방지하기 위해 약하게 불을 때고 있어서인지 따뜻하게 느껴지는 온돌방에서 몇 번 땀을 흘리고 난 뒤로는 이제 아예 기도방에 갈 생각조차 안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꼭 성체 앞에서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하면서 제 나름으로 변명을 하지만, 그래서 기도를 덜 하게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우리 몸으로 느껴지는 이유들, 예를 들어 추위나 더위 또는 피곤함이나 배고픔 때문에 기도생활에 소홀해지거나 아니면 기도를 하더라도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운 것은, 한편으로는 핑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신수련 피정을 들어가면 면담 때마다 지도신부님께서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잠은 잘 자는지를 물어보시죠. 기도에 집중할 수 있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조건들을 잘 채울 수 있도록 지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보다도 더 자주 그리고 더 큰 힘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생활, 영성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네, 바로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러한 예는 너무나 많지요.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용서입니다.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신앙인으로서 그를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쉽게 용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자꾸만 미움과 원망이 되살아나서 마음이 편치 않죠. 그런데 또 괴로운 것은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원수를 사랑하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 때마다 죄를 고백하고 은총을 청하지만, 그 미움은 도무지 사라지질 않죠.

용서뿐만이 아닙니다. 자꾸만 누군가를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 다른 이들에게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고 싶은데 별것 아닌 일로 얼굴 붉히고 화를 내고는 또 금세 후회하는 것,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내가 속한 본당 단체에서 다른 이들과 더불어 기쁘고 행복하게 생활하고 싶은데 크고 작은 이유들로 갈등을 겪고 마음 부대껴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다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 곧 심리적 차원에서 겪게 되는 일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지금의 내 모습에서 더 나은 모습,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파스카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죠.

지금까지 계속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몸 차원과 정신/마음 차원, 영의 차원을 동시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싶어 하는 파스카의 삶도 이 세 차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파스카 하는 것의 가장 깊은 의미는 영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몸의 상태나 마음 상태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실제로는 우리가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파스카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들이 직접적으로 영의 차원과 관련되기보다는 다른 두 차원, 그중에서도 정신/마음 차원에서의 일들과 연결된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차원의 접근보다는 구체적인 심리 차원의 접근이 먼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용서의 경우,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도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도의 내용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심리의 차원에서 자기 마음을 살피는 일이죠. 그 사람이 왜 미운지,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지, 정말 내 마음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게 될 때 그럼 내가 하느님께 청해야 하는 은총은 어떤 것인지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행위는 같지만, 그 기도의 내용은 달라지는 것이죠.

결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영성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심리적 차원도 함께 돌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전에는 이 ‘심리’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많이 계셨지만 이제는 교회 안에서도 심리적 돌봄에 대한 필요성을 많이 느끼는 것 같습니다. 교구 주보의 알림란을 보더라도 교회 내 단체들에서 운영하는 심리상담센터에 대한 안내들이 굉장히 많으니까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심리가 모든 것의 답이 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영성생활이 종교성을 띤 심리생활로 축소되어 이해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정신/마음 차원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리하시는 영의 차원을 함께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니까요. 결국에 우리는 영의 차원, 영성의 차원, 신비의 차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이 몸과 마음을 지닌 인간인 이상 심리적인 요소들을 배제하고 영적으로만 나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영적인 차원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를 향해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는 심리적인 차원을 함께 살피는 것, 바로 영성과 심리의 통합입니다.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