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김동규(프란치스코) 서예가

성슬기 기자
입력일 2017-08-01 수정일 2017-08-01 발행일 2017-08-06 제 3056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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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속에서 하느님 음성 듣고 다시 붓 잡아”
마흔에 들어선 서예의 길 거듭되는 실패로 좌절할 때 특별한 신앙 체험하고 재기
칠전팔기로 작품 인정 받아
“재능 주신 은혜 봉사로 보답”

“신앙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가요?”

서예가 김동규(프란치스코·66)씨는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은 신앙 뿐”이라면서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을 활용해 봉사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원래부터 신앙심이 이토록 깊은 신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깜깜한 터널 같았던 시련을 이겨내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됐다고.

놀라운 점은 그를 깜깜한 터널로 인도한 것도,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다름 아닌 ‘서예’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서예협회 대의원과 경기도지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중국 산동성 제남시에서 열린 한·중·일 국제서예교류전 등 다양한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한 이력이 있다.

학창시절엔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 때문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돈을 벌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집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곤 했다. 미술에 대한 미련이 계속 남아서다.

어느 날, 그를 지켜본 이웃집 아주머니가 그에게 서예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문득 어릴 적 할아버지께 배운 붓글씨가 생각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김동규 작가가 7월 8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 콘퍼런스룸에서 열린 한 행사 중 서예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곧장 아내에게 달려가 의논했다. 가장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이 그를 망설이게 했다. 옆에서 그를 지켜본 아내는 그의 꿈을 꺾을 수 없었다.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있던 아내는 “내가 가정을 책임지겠다”면서 흔쾌히 남편의 길을 응원했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은 따가웠고, 9년여 만에 문을 연 서예학원도 금방 문을 닫아야 했다. 그는 “돌멩이를 맞는 기분이었다”고 당시 기분을 털어놨다. 그렇게 변변찮은 생계수단 없이 또 8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때 흘린 땀과 눈물이 한 통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하느님 체험을 한 것은 이 때였다. 그는 다시 도장 만드는 일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인천에 위치한 대형 서점에서도 자리를 내줬다. 그리고 일을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밥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잠깐 시간을 내 아내가 싸준 김밥을 한 입 먹었는데,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귀에서는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이제 네 뜻을 들어주겠다’는 환청 비슷한 하느님 음성이 들렸습니다. 저는 ‘감사하다’는 말만 계속 중얼거렸지요.”

그는 “하느님 말씀이 들렸다는 신부님들을 보면서 늘 거짓말쟁이라고 생각을 했다”면서 “믿기지 않겠지만, 직접 체험해보니 알겠더라”고 덧붙였다.

7년 전 서울로 이동한 그는 “하느님이 제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라면서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김 서예가는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2층 대형서점 내 작업실에 찾아가면 늘 만날 수 있다. ‘전각’(篆刻·도장), ‘서각’(書刻·나무에 짧은 문구를 새긴 작품), 캘리그라피 등 다양한 작품도 주문, 구매할 수 있다.

성슬기 기자 chiar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