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민족·화해·일치] 회한–가난하지만 아름다운 / 윤훈기

윤훈기(안드레아) 토마스안중근민족화해진료소 추진위원
입력일 2017-08-01 수정일 2017-08-01 발행일 2017-08-06 제 3056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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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명동성당은 내 생의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경내로 경찰이 들이닥치자 김수환 추기경님은 “나를 밟고 가라. 나를 밟고 가도 신부와 수녀들을 밟아야 할 것이다”라며 강제진압을 물리쳐 주셨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감동에 전율까지 더해져 눈물이 마구 흘렀다. 천주교는 물론 민주화운동과도 거리가 멀었던 나는 그 한 말씀에 개종을 결심했다. 1988년 의사 1년 차 시절, 본당 신부님은 “돈 벌기 위해 일하지 말고, 원죄를 갚는 마음으로 일하라.”, “네 분야에서 일을 제일 많이 하라. 세금도 제일 많이 내라. 하지만 제일 가난하게 살아라.”, “십일조는 안 해도 되지만 세금은 1원 한 푼 속이지 마라”고 명하셨다. ‘네 나라가 잘돼야 천주교도 산다’라는 논리였다.

신부님 조국 아일랜드의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영성을 익히기 위해 해마다 그 나라 성지를 순례했다. 그러면서 분단과 화합의 의미도 알게 됐다. 1997년도부터는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복잡하게 꼬인 역사의 실타래는 한 올씩 정성껏 풀어야 했다. 21세기에 들어서자 베트남전쟁 양민피해지역에 가서 사죄 진료를 수차례 했다. 우리집은 베트남전쟁으로 살만해졌고,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업보를 조금 풀자 마음은 다시 북으로 향했다. 평양의대 현대화지원사업은 당국의 협조로 잘 진행됐고 개성에도 진료소가 세워졌다. 하지만 시류가 바뀌자 통일부도 변했다. 통일가도에 먹구름이 짙어지더니 결국 개성진료소도 폐쇄됐다. 다시 전쟁기운이 감돌았고, 역사는 원점을 넘어 원시시대로 회귀한 듯했다. 그동안 입북할 때마다 미국 간섭을 받는 것도 언짢았지만, 요즘 미국은 개성공단 재개를 원치 않는 것 같다.

의사는 자신의 가슴속에 환자의 고통을 담아내고, 또한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타인에게 나누어주는 직업이다. 그래서 영혼이 마모되고 스러진다. 그 힘든 일 30년에 통일운동 20년, 오랜 세월 가지가지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견뎌 왔지만, 이제는 많이 쉬고 싶다. “현실주의자가 되라. 하지만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라”는 어느 선각자의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고통스러울 때마다 되뇌었다. 하지만 나의 꿈(안중근 의사가 민족학교를 세웠던 남포에 토마스안중근민족화해진료소 건립)은 실현이 어려워 보인다. 민족화해를 위한 대화조차도 일본과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서 무슨 빠른 진전이 있을까? 그래도 ‘하느님은 시간을 충분히 만드셨고 그래서 서두르지 않으신다’는 격언도 있듯이, 아직 먼 훗날을 기대할 수는 있다. 미래는 이제 후배들의 몫이다.

신부님 말씀만 따르다가 세금폭탄과 빚더미로 삶이 피폐해졌다. 그래서 이제는 좀 추스르고 살아야겠다. 하지만 남북한의 형제자매가 다시 만나 다시는 헤어짐이 없는 통일의 그날을 영원히 기다리겠다. 또한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조국을 늘 염원하겠다. 회한은 많지만 더 성찰하며 인문학공부로 홀로 조용히 남은 생을 채울 생각이다.

윤훈기(안드레아) 토마스안중근민족화해진료소 추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