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녀 윤점혜 아가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7-25 수정일 2017-07-25 발행일 2017-07-30 제 3055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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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 생활 위해서 남장·과부 행세 하기도
동정녀 공동체 만들어 회장직 수행
극기·묵상 등에 매진하며 모범 보여

복녀 윤점혜 아가타 초상화.

윤점혜(아가타) 복녀는 동정생활로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며 동정녀 공동체를 이끌던 순교자다.

복녀는 1778년 경 태어나 경기도 양근의 한감개에서 살며, 어머니 이씨에게 교리를 배웠다. 복녀는 파평 윤씨 일가로,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루치아)의 언니이자 1795년 순교한 윤유일(바오로)·1801년 순교한 윤유오(야고보) 형제의 사촌이었다.

복녀는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기 위해 동정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당시 사회는 여성이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기에, 복녀는 몰래 집을 떠나기로 했다. 복녀는 자신의 혼수로 마련해 둔 옷감으로 남자 옷을 지어 남장을 하고 사촌인 윤유일의 집에 숨었다. 이 일로 가족과 이웃들에게 큰 질책을 받았지만, 복녀는 뜻을 꺾지 않았다.

복녀는 이후로도 과부 행세를 하며 동정을 지켜나갔다. 1795년 주문모 신부의 입국 소식을 들은 복녀는 모친과 함께 한양으로 이주했고, 2년 후 세례를 받았다.

복녀는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모친이 선종하자, 모친을 위해 연도를 자주 바쳤다. 또 자신의 수호성인인 아가타 성녀처럼 순교할 수 있게 되길 기도하곤 했다.

복녀는 여회장 강완숙(골룸바)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주문모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어 그 회작직을 수행했다. 복녀는 교리의 가르침을 엄격히 지키면서 극기, 묵상, 성경읽기 등에 열심해 다른 신자들의 모범이 됐다. 또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치며 신앙의 길로 이끌었다.

복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함께 생활하던 강완숙 회장, 동생 부부 등과 함께 체포돼 포도청에 압송됐다. 갖가지 형벌을 받았지만 복녀는 밀고와 배교를 거부했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복녀는 최후 진술에서도 “10년 동안이나 깊이 빠져 마음으로 굳게 믿고 깊이 맹세하였으니,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라도 마음을 바꾸어 신앙을 버릴 수는 없다”고 강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복녀의 사형은 복녀의 고향인 양근에서 집행됐다. 양근으로 이송된 복녀의 수감 생활을 지켜보던 신자들은 “아가타가 말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오히려 아주 태연자약하여 이 세상을 초월한 사람 같았다”고 증언했다.

복녀의 순교 당시 신비로운 현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1801년 7월 4일 당시 복녀의 순교를 지켜보던 신자들은 한결같이 참수를 당한 복녀를 보고 “순교자의 시신에서 흐르는 피가 젖과 같이 희게 보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양근성지에 있는 윤점혜 동상.(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양근성지, 어농성지

양근성지(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물안개공원길 37)는 복녀가 유년시절을 보내며 교리를 배운 곳이자 순교한 곳이다.

또한 복녀의 집안 파평 윤씨의 선산에 자리한 어농성지(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62번길 148)에는 복녀 의묘가 마련돼 있다.

※문의 031-775-3357 양근성지, 031-636-4061 어농성지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