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최창주 마르첼리노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7-18 수정일 2017-07-18 발행일 2017-07-23 제 3054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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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로 석방… 죄를 뉘우치며 더 열성적 선교
옥중에서 6개월 이상 형벌 받으면서
함께 잡힌 신자들과 굳건히 신앙 지켜

복자 최창주 마르첼리노 초상화.

최창주(마르첼리노) 복자는 한 차례 신앙을 부정했지만, 6개월 이상의 고된 옥중 생활 끝에 순교로 믿음을 증거한 순교자다.

복자는 여주의 양반으로 40대 초반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온 가족을 입교시켰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신자로 지목돼 광주로 압송됐지만 배교해 석방됐다.

복자는 이때부터 늘 배교한 죄를 뉘우치고 더 깊은 신앙을 지니고자 노력했다. 가족과 이웃에게 더욱 열성적으로 선교했고, 두 딸은 모두 교우에게 출가시켰다.

1800년 예수부활대축일, 양섬에서 부활대축일을 맞아 여러 신자들과 모임을 하던 사위 원경도(요한)가 체포됐다. 아직 박해령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지는 않았지만, 평소 천주교 신앙을 탐탁치않게 여기던 여주 관장이 포졸들을 보내 체포한 것이다. 또 은밀히 신자들을 색출하고 있던 상황이었던 터라, 복자의 아내와 어머니는 복자가 피신하도록 간청했다.

복자는 마지못해 한양을 향해 길을 나섰지만, 이내 발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배교를 뉘우치면서 순교를 다짐했던 마음을 되찾았던 것이다. 복자는 집으로 돌아온 날 밤 즉시 체포돼 여주 관아로 끌려갔다.

복자의 옥중 생활은 6개월 이상이나 계속됐다. 복자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천주교에서는 누구에게라도 해를 끼치는 것을 금하니 한 사람도 고발할 수 없다”면서 밀고를 거부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선포되자 형벌이 더욱 가혹해졌다. 경기 감영으로 압송된 복자는 함께 잡힌 신자들과 서로 격려하면서 고난을 이겨나갔다.

복자는 문초를 받는 신자들을 대표해서 “모든 사람들의 임금이시며 아버지이신 참 천주를 알고, 그분을 섬기는 행복을 받았으니, 우리는 그분을 배반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감사는 복자를 비롯한 잡혀온 신자들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했다. 감사는 보고를 통해 “모진 형벌을 당하면서도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지 않았고, 끝내 (천주교 신앙을 믿는) 마음을 고칠 수 없다고 했다”면서 “뿐만 아니라 아주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고 기록했다.

조정은 함께 잡혀온 여주 지역의 신자들과 함께 처형을 위해 다시 여주로 이송했다. 박해자들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하는 의도로 신자들을 고향에서 처형했다. 1801년 4월 25일, 당시 52세였던 복자는 여주 관아 남쪽 부근에서 참수를 당했다.

여주성당과 여주 지역 순교자 현양비.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여주성당·어농성지

용인대리구 여주성당(경기도 여주시 우암로 5)은 복자의 순교터로 추정되는 비각거리에 현양비를 세우고, 복자와 여주 지역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어농성지(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 62번길 148)도 신유박해의 순교자인 복자를 현양하고 있다.

※문의 031-636-4061 어농성지, http://onong.or.kr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