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파스카의 삶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
입력일 2017-07-18 수정일 2017-07-18 발행일 2017-07-23 제 3054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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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중심에서 ‘너’ 중심의 삶으로 건너가야
"전 생애를 통해 기억해야 할 파스카의 신비"
 

W. H. 마겟슨 작품 ‘유월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의 피를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찬미 예수님.

지난주에 우리는 “나는 왜 이럴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해 신학이나 철학, 그리고 심리학에서 바라보는 인간 삶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각각의 학문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구체적인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그 핵심의 내용에서는 하나의 공통점이 드러난다는 것이었지요. 바로,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어떤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 건너가려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떠세요? 이 말에 공감이 가시나요? ‘어, 나는 그런 생각을 별로 안 해봤는데?’ 하고 의문이 들기도 하시나요?

사실 우리의 삶이 지금의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 건너가려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이 ‘또 다른 상태’로 간다는 것이 어떤 거창한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일상의 사소한 일일 수도 있다는 거죠. 오늘 계획한 어떤 일이 있다면 그 일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도 있고, 아니면 하다못해 요 앞 동네 마트에서 하는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 ‘내 돈 주고 사기는 아깝지만 그래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왔던 경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 가기를 원하는 방향성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것들은 조금 얕은 차원의 것이기도 하죠. 그럼 좀 더 깊은 차원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 애가 좋은 대학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친정 식구들 사이의 어려움이 잘 풀려서 우리 형제들이 좀 더 화목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거나, 직장 생활에서 힘든 것들이 해결되어 더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또 다른 상태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방향성이죠. 하지만 이러한 방향성이 앞서의 바람들보다 조금 더 깊은 차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보다 더 깊은 차원이 아직 있습니다. 바로, 삶을 살아가는 나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부분입니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나 주위 환경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나 자신입니다. 주위 환경에 휘둘려서 부대끼고 힘들어하기보다, ‘나’라는 사람의 중심을 잡고 평안하고 담대하게, 가능한 한 기쁘고 보람 있게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은 바람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들었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고 싶어 하는 것은 하지 않고 오히려 싫어하는 것을 하는’(로마 7,15 참조) 모습이 아니라, 내가 정말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자유롭게 해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죠. 인정받는 것보다는 사랑받기를 더 원하고 깨닫고 싶은 마음,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더 자유로운 상태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우리 삶의 근본적인 방향성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이런 바람, 방향성에 대해서 이제 공감이 되시나요?

그런데 이런 방향성의 여러 얕고 깊은 차원들을 생각하다 보면, 그 안에 또 다른 특징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건너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 가려는 방향성을 말씀드리면서 이를 ‘나아간다’ ‘건너간다’ 등의 표현으로 말씀을 드렸죠. 우리 삶의 얕은 차원들에서는 또 다른 상태로 ‘나아간다’라는 표현도 맞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 사람의 삶이나 문화에 대해 호기심이 많아서 무언가를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여러 나라를 소개하는 책이나 TV 프로그램을 많이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런 시간이 오래될수록 그 사람은 여러 나라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상태로 가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고, 그 노력들이 쌓이면서 조금씩 그 상태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조금 어렵게 말씀드리면, ‘일련의 과정이 계속되어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 날 외국에 나갈 기회가 생겼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느 한 나라에 대해서 많은 책과 자료들을 통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 나라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일들을 겪게 된다면 책을 통해 쌓아왔던 지식과는 또 다르게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양적으로 무언가가 계속 쌓여서 새로운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아주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새로운 상태로 ‘건너간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우리 삶의 얕은 차원들에서는 새로운 상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허약한 몸에 운동을 계속해서 건강해질 수도 있고, 공부를 계속해서 새로운 자격증을 딸 수도 있지요. 하지만 우리 삶의 근본적인 깊은 차원에서는 이렇게 ‘나아가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상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쪽 강둑에서 저쪽 강둑으로 훌쩍 뛰어넘는 것처럼, 어렵게 표현하면 어떤 ‘질적인 도약’을 통해서 ‘건너가야’ 하는 상태인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의 근본적인 방향성은 지금의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건너가려는’ 방향성인 것입니다.

이렇게 ‘건너간다’라는 말씀을 드리니까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으신가요? 네, 맞습니다. 바로 ‘파스카’입니다. 이 ‘파스카’라는 말이 어떤 뜻이죠? ‘건너간다’라는 뜻이죠. 물론 여기에서 건너간다는 것은 이집트의 맏이들이 모두 죽는 재앙에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건너뛰고 지나간 사건(탈출 12,1-36 참조)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렇게 건너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앞서 말씀드린 새로운 상태로 ‘건너가는’ 방향성을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집트 종살이를 오래 한다고 해서 해방의 상태로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죽음이 계속된다고 해서 부활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둘 사이의 차이를 뛰어넘는, ‘건너감’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을 산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지금의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파스카 하는 것’이죠.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에서 사랑받는 것으로, 싫어하는 것을 자꾸만 하는 것에서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뿌리 깊은 나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을 닮은 너 중심의 삶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결국 ‘파스카의 신비’는 부활시기에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 기억하고 살아야 하는 신비라는 것, 그래서 우리의 삶이 곧 파스카의 삶인 것입니다.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