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사회교리 아카데미] 여든여덟 번 손이 가야 만들어지는 쌀 한 톨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rn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
입력일 2017-07-11 수정일 2017-07-12 발행일 2017-07-16 제 305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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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살리는 농업’ 지켜내자
지금도 밥을 먹을 때 쌀 한 톨 남기지 않는 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밥상머리 교육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고 나면 자녀들의 밥그릇 안을 보셨습니다. 평소 다른 일에는 인자하고 관대했던 아버지지만, 밥그릇 안에 쌀 한 톨이라도 남아 있으면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농민들이 한여름 뙤약볕에도 수고를 아끼지 않고 ‘여든여덟 번’(八十八)이나 손길을 주어야 ‘쌀’(米)이 되는 거란다. ‘쌀’은 ‘그저’ 쌀이 아니라 곧 ‘농민의 피땀’인 거지. 그러니 남은 한 톨까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먹어야 하는 거야.” 어디 쌀만 그렇겠습니까. 생명의 하느님께서 주신 땅과 햇볕과 물과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농민의 정성 어린 노고가 함께 일구어낸 모든 생명 품은 작물들이 다 마찬가지지요.

■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

하느님은 농부시랍니다. 하느님에 대한 어떠한 표현보다도 정겹고 포근합니다. 흙빛 얼굴, 억센 팔뚝,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사이 넉넉한 웃음. 밥을 짓는 농부님, 아니 밥이 되어준 농부님들을 떠올립니다. 농부는 자신의 소중한 소출을 먹고 힘차게 살아갈 누군가를 떠올리며, 길이든 바위든 가시덤불이든 좋은 땅이든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립니다(루카 8,4-8). 어리석게 보이는 참된 지혜, 무모한 듯 느껴지는 참된 용기, 제 살을 깎아 남을 먹이는 참된 사랑을 봅니다. 하느님이 농부이시듯, 농부는 하느님입니다.

■ 농민이 웃는 세상을 만들어요

“농민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인간과 자연이 협력하여 하느님 창조질서에 가장 친밀하게 동참하는 생명을 일구어 왔습니다. 그러나 전면적인 농산물시장 개방과 세계화의 진행으로 농촌 공동체는 파괴되고, 농업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2014년 현재 농가인구는 전체 국민의 5.3%인 275만 명으로 줄었고, 이마저도 69%가 60세 이상입니다. 농가의 평균 경작면적은 1.5ha에 불과하고, 연간 농업소득은 1천만 원 가량으로 영세 소농구조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도·농간 소득격차가 큰 폭으로 확대되어 도시근로자 가구 대비 농가소득은 57%로 매우 심각한 수준입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주식이자 농업의 근간인 쌀까지 지난해부터 관세화를 통해 완전 개방되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2016년 제21회 농민주일 담화문).

농민이 울고 있습니다. 서럽고 억울해서 울고 있습니다. 가뭄에 타들어가는 마음을 몰라주어도 그저 허허 웃으며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한여름 땡볕에 녹초가 되어버린 몸뚱이를 보듬어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자신의 피붙이 같은 농작물을 그저 잘 먹고 건강하게 살아주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기쁘게 생명을 품은 농사를 지을 수만 있다면 좋을 따름입니다. 사회가 매일 그 유지를 위해 필요로 하는 재화를 공급해 주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농사(노동하는 인간, 21항 참조)를 짓는 보람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해 농민이 울고 있습니다. “회복 불가능하고 때로는 소멸되어 버리는 육체 노력과 사회의 무관심”으로 “자신들을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으로 느끼게 되는”(노동하는 인간, 21항) 농민이 생명을 살리는 농업을 한낱 저급한 돈벌이의 논리로 설명하려는 가진 자들의 횡포 앞에 힘없이 쓰러지고 있습니다. 절대 규칙이 되어 버린,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현실(복음의 기쁨, 56항 참조)이 기가 막혀 농민이 울부짖습니다.

더 이상 농민이 피눈물 흘리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생명이신 하느님을 닮아 생명을 가꾸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고된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농민이 웃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농민 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도리입니다.

상지종 신부(의정부교구 정의평화위원장)rn1999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의정부교구 파주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