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언제나 약자들 편에서 / 노성호 신부

입력일 2017-07-11 수정일 2017-07-11 발행일 2017-07-16 제 305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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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호 신부 (용인대리구 양평본당 주임)
저녁을 먹고 있는데 동생을 찾는 전화가 왔습니다. 동생은 통화를 끝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밥을 먹었지요. 밥을 거의 다 먹어 가는데 또 동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시간이 좀 흐르고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또다시 전화…. 처음에는 가족 모두 “누구니?” 그러면서 궁금해 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당연히 올 전화가 또 왔군!’ 하면서 태연하게 넘어갔지요. 그 후로도 동생을 찾는 전화는 자주 왔습니다. 중학생 시절의 제 동생 이야기입니다.

또래에 비해 덩치도 크고 마음씨도 넉넉했던 동생은 많은 친구들의 나무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숙제나 준비물, 선생님의 지시사항 등을 물어보는 애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동생은 친절하게 안내를 해줬지요.

그런데 전화를 걸어오는 애들 대부분은 소위 ‘좀 모자라는 아이들’이었습니다. 한 번 알려주면 그것으로 충분했을 일도 그 아이들은 수차례 전화를 걸어 물어오곤 했지요. 아마 그만큼 그 아이네 전화비도 많이 나왔을 겁니다. 그래도 동생은 말했던 내용을 똑같이, 아니 처음보다 더 자세하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곤 했습니다.

한 번은 등굣길에 어떤 애를 업어줬었나 봅니다. 다리를 심하게 다쳐서 목발을 짚고 다니는 아이였는데, 힘들어하기에 자기가 업어줬다고 합니다. 그 부모가 어찌나 고마워하던지 동생 칭찬을 엄청나게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동생이 늘 가깝게 지냈던 친구들은 한결같이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시쳇말처럼 자주 말하는 ‘왕따’인 아이들, 어디가 아프거나 다친 아이들,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매번 혼만 나는 아이들, 선생님의 관심 밖에 있는 아이들이 동생의 친구들이었지요. 어찌나 그들을 진심어린 마음으로 챙겨주고 품어 주던지요. 저는 정말 그렇지 못했거든요.

주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답니다. 마치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라며 예수님을 비난했던 바리사이들과 같은 마음으로 제 동생의 행동거지를 염려(?)하는 이들도 있었답니다.

사실 저도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답니다. ‘쟤는 왜 공부도 잘하면서 공부를 지지리도 못하는 애들과만 어울려?’, ‘아니, 그 잘난 애들 내버려두고 왜 저런 애들이랑 친구로 지내?’, ‘만날 물어보고 또 물어보는 애들이 답답하지도 않나?’ 부끄럽지만 이런 생각들을 했었지요. 그래도 동생은 자신이 아니면 그 애들과 친구를 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라 여기면서 정성을 다했습니다. 결국 동생은 3학년 때 ‘전교학생회장’에 당선되더군요. 압도적인 표 차이로요.

예수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태 9, 12)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생이 어려움 중에 있던 친구들에게 진심을 다했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잘난 애들이라고 왜 제 동생과 같은 친구가 필요하지 않았겠어요? 다만 동생은 친구가 더 절실했던 아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더욱 간절했던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죄가 많아 불쌍하고, 부족함 투성이인 우리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의인의 구원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의 앞에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저는 동생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는 형입니다. 다들 “형만 한 아우 없다” 하지만, “형보다 아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