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녀 이성례 마리아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7-11 수정일 2017-07-11 발행일 2017-07-16 제 305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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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39세에 참수돼
최경환 성인과 혼인해 수리산에 정착
남편·어린 자녀들과 함께 잡혀 형벌 받아
자녀들에게 “천주·성모 잊지 말라” 유언

복녀 이성례 마리아 초상화.

이성례(마리아) 복녀는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어머니다. 복녀는 남편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수리산 교우촌을 일구며 신앙을 지켜나간 순교자이기도 하다.

복녀는 내포의 사도로 잘 알려진 이존창(루도비코)의 집안 출신으로, 이존창이 순교한 1801년에 태어났다. 17세가 되던 해 복녀는 최경환과 혼인해 1821년 최양업 신부를 낳았다.

이후 한양으로 이주해 생활하던 복녀는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강원도, 인천 등지로 떠돌며 생활했다. 복녀는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이주하면서 어려움과 궁핍을 겪으면서도 이를 신앙으로 이겨냈다.

신앙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굶주림에 지친 자녀들에게 요셉과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던 이야기나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들려주며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돌봤다.

그러다 정착한 곳이 안양 수리산이다. 복녀와 그의 가족들은 수리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고, 이내 신자들이 모여 교우촌을 이뤘다. 이런 생활 중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났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복녀는 한양을 오가며 신자들을 돌보던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던 중 포졸들이 수리산 교우촌에 들이닥쳤다. 복녀는 자신들을 잡으러 온 포졸들에게 오히려 음식을 대접하고 쉬어갈 수 있도록 했고 이어 남편, 어린 자녀들과 함께 포도청으로 압송됐다.

복녀는 팔이 부러지고 살이 찢어질 정도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했다. 하지만 그에겐 이런 육체적 고통보다 자녀들이 겪는 고통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한 살배기 아들이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광경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남편이 옥사하자 복녀는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결국 배교해 석방됐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복녀는 이내 장남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다시 체포됐다. 한 차례 배교를 택한 복녀였지만, 이번에는 큰 용기로 끝까지 신앙만을 증거했다.

복녀는 자녀들에게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라”면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최양업)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고 유언을 남기고 184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수리산성지

수리산성지 전경.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수리산성지(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08)는 복녀가 가족들과 함께 정착하고 교우촌을 이뤄 생활하던 자리다. 성지는 복녀와 최경환 성인, 최양업 신부를 현양하고 있다.

※문의 031-449-2842 수리산성지, www.surisan.kr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