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독자마당]]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상)

이학노(유스티노·서울 대치동본당)
입력일 2017-07-11 수정일 2017-07-12 발행일 2017-07-16 제 3053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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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18)

한센병 환자 열 명을 고치신 후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감사를 드리러 왔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늘상 듣고 접하는 내용이다. 이외에도 성서에서는 감사의 표시를 여러 가지 형태로 들려준다. 세관장 자캐오는 자기집을 찾아주신 예수님께 감격하여 재산의 절반을 자선을 위해 쓰겠다(루카 19,18)고 말씀드린다. 또한 악령이나 질병으로 시달리다가 나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여자들도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과 제자를 비롯한 일행을 도왔다(루카 8,1-3)고 성서는 전한다.

그 외에도 바오로 사도를 비롯한 복음사가는 서간을 통해 또는 선교 여행을 다니면서 성령에 의한 기쁨, 영광과 함께 주님께 감사하라는 내용을 자주 전한다.

필자는 1975년 부활절에 지금의 세종시에 위치한 조치원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이후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신자들 중 감사의 의미를 머리에 깊게 심어준 몇몇 분을 기억해 보고자 한다.

1977년 근무지 관계로 부산에 내려갔을 때 필자의 근무지역은 지금의 해운대구 반여1동으로, 주위에는 큰 제조업체와 육군 특수병과 학교가 위치하고 있어 그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만 해도 만여 명에 가까웠다. 대부분 타지에서 온 사람들로, 어림잡아도 천여 명에 가까운 신자들 대부분은 신앙생활을 하기가 여의치 않았고, 성당에 가려 해도 20여 분 정도는 족히 기다려야 오는 시내버스를 타고 30여 분을 가야만 가까운 동래성당에 닿을 수가 있었다.

그때 필자의 견진대부가 되는 류제세(에우제니오·1945년생·2016년 8월 선종) 형제는 반여1동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 자기집 2층 양옥을 공소로 내어놓았다. 2층 베란다에 가벽을 설치하고 지붕을 씌우고 제단도 만들고, 당시 이갑수(가브리엘·2004년 12월 선종) 주교님과 허성(야고보·당시 동래본당 주임) 신부님을 모셔와 축복식을 갖고 매주일 미사를 드렸다. 처음에는 빈자리가 많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주위의 신자들과 근로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초대 공소회장이 된 류제세 에우제니오 형제 부부는 온 가족 모두가 함께 정말 열심히 봉사했다. 신자들이 넘쳐나자 그는 자기집 2층 방과 거실 창을 모두 뜯어내고 앉을 자리를 더 만들어 미사 때 불편함이 없도록 했고 주일학교도 운영하면서 계단과 마루, 방을 교리실로 사용했다. 그리고 성가대도 결성하여 매주 오후 늦게까지 연습을 했다. 나는 그때 선교분과를 맡아 근처 사회복지시설에서 봉사하는 수녀님을 모셔와 대부분이 근로자들이었던 예비자들에게 교리공부를 시켰다. 매년 한두 번은 모 본당인 동래본당에서 세례식을 봉헌하거나 신부님이 직접 공소에 오셔서 세례를 주시기도 하셨다. 나중에 신부님이 본당 사목 형편상 오시기가 어려워지자 우리들은 은퇴하신 초대 부산교구장 최재선(요한·2008년 6월 선종) 주교님을 모셔와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매주 주교님과 함께 국수 한 그릇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성모회와 레지오 등 각종 모임과 봉사단체별로 교육도 하고 아이들은 각방마다 옹기종기 모여 숙제를 서로 도와가며 하던 일들이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다. 때로는 의견이 서로 달라 얼굴을 붉히기도 몇 번씩, 어려운 때도 있었지만 참 즐거운 신앙생활이었고 그 장산공소는 현재의 장산본당으로 성장하여 그곳을 지날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초대 공소회장 류제세 에우제니오 형제는 지난여름 오랜 신병 끝에 선종했다. 투병생활 중 그는 가족들이 돌보기 힘들 정도가 되어 요양병원을 전전했다. 그는 나에게 “어려운 사람 대신 보속으로 나에게 이런 병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하였다. 그리고 그는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뇌경색으로 기억력이 흐려지는 중에도 기도문을 잊지 않기 위해 머리맡에 크게 써 붙여 놓고 내가 방문할 때마다 함께 기도하기를 원했다. 병원 근처 성지를 자주 가고 싶어 했으며 봉성체 대신 주일미사를 어떻게든 참석하려고 했다.

병으로 눕기 전 하던 사업도, 이것저것 벌려 놓은 것들도 시원스럽게 되는 것이 없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감사할 내용을 찾아 빠짐없이 감사미사를 드렸다. 10여 년간의 투병 생활 속에서도 이러한 요양처를 찾게 해주셔서 감사, 귀한 약과 처방을 받게 해주셔서 감사…. 그의 감사는 끝이 없었다. 이 세상 마지막 날 그는 병원 창문 밖 푸른 하늘을 유심히 쳐다본 후 눈을 감았다.

(계속)

이학노(유스티노·서울 대치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