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392) 순간, 순간을 다스림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17-07-04 수정일 2017-07-04 발행일 2017-07-09 제 3052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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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지방에 있는 어느 수녀원에서 ‘배려의 마음’을 주제로 피정 지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피정 지도는 잘 마쳤고, 마지막 날에는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수녀님들이 화해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왜 그리 피로가 몰려오는지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옆으로 휘청휘청하다가…. 어느덧 버스는 터미널에 도착을 했습니다. 눈은 시뻘겋게 토끼 눈이 됐고, 몸은 축 처지고…. 그래도 부지런히 수도원에 가려고 터미널을 나와서 지하철역으로 갔습니다. 등에 메는 가방 외에도 한 손에는 또 다른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승강장 벽에 붙은 시도 읽고 좋은 글귀도 훑어보면서 피로와 무료함을 달랬습니다. 이윽고 지하철이 도착해 타려고 보니, 앞에는 네댓 명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이 내리고 지하철을 타려는데, 바로 앞에 있는 분이 느그적 느그적 지하철을 타는 것입니다. 순간, 가방의 무게만큼이나 짜증이 밀려왔습니다.

‘아, 좀 사람들 다 내렸으면, 빨리빨리 좀 타시지.’

피정 지도는 잘 했지만, 한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짜증을 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모순이었습니다. 변명 아닌 변명으로, 나는 그저 지하철에 빨리 타서 빈자리에 앉거나, 혹은 등에 메고 있는 짐 가방이라도 지하철 선반에 올려놓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적미적 지하철을 타는 이를 보곤 바로 뒤에서 구시렁구시렁거렸습니다.

서서히 지하철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서둘러 손에든 가방과 등에 멘 가방을 물건 칸 위에 놓은 다음, 자리를 찾으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순간, 미적-느그적 거리던 남자분이 내가 서 있는 문의 반대편 문 쪽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아뿔싸!’

그분은 ‘맹인’이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아 행동이 느린 것 빼고는 거의 정상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던 그분은 ‘맹인’이었습니다. 그분은 나와 같은 정류장에 내렸고, 나와 환승하는 방향이 같았습니다. 그분은 내릴 때에도 조금은 늦게 움직였지만, 태연하게 행동하며 자신의 길을 갔습니다.

지하철 안에서 그분과 함께 내린 후, 또 그분이 가는 길을 계속 지켜보면서, 나는 그 어떤 말도 건네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죄송함이 밀려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스스로 보는 방법을 터득한 분. 또한 표정 자체에서도 부드러움이 묻어있는 그분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보면서 ‘배려’라는 주제로 피정 강의를 하고 온 내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피정 강의를 스스로 잘했다는 판단과 피곤하고 힘들었다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의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에 짜증을 내는 내 모습이 창피했습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일상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에서 드러난다고 강조하던 내 자신. 정작 이웃과 살아가는 순간의 시간 속에서는 언제나 내 방식대로 세상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이 철없는 내 모습. 그렇습니다. 한순간, 순간을 좀 더 온유하게 살려고 노력하면 언젠가 우리는 순간, 순간을 겸손하게 잘 다스리지 않을까 묵상해 봅니다.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