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홍익만(안토니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7-04 수정일 2017-07-04 발행일 2017-07-09 제 3052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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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로 피신 중에도 교회서적 지니고 교리 전파

복자 홍익만 초상화.

홍익만(안토니오) 복자는 박해로 피신하면서도 교회서적을 지니고 교리를 전한 순교자다.

복자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나 양근에서 살다가, 1790년 한양의 송현(현 중구 남대문로 3가)으로 이주해 살았다. 1785년 김범우(토마스)에게 「천주실의」를 빌려 읽고,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을 비롯한 당시 교회 지도자들과 토론하면서 교리를 익혀 신앙생활을 했다. 1796년경에는 사위인 홍필주(필립보)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밤낮으로 토론하기도 했다.

복자는 1801년 신유박해의 순교자인 복자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촌 동생이고, 복자 홍필주와 복자 이현(안토니오)의 장인이다.

복자의 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하부조직이자 집회소였던 ‘육회’(六會) 중 하나였다. 복자의 집이 주문모 신부가 은신하던 양제궁의 후문과 통해있어, 복자는 주 신부와 자주 만났고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복자는 이희영, 김건순 등의 신자에게 주 신부를 소개하기도 했고, 1797년 김건순과 주 신부가 만났을 때 주 신부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1799년 가을에는 주 신부와 동행해 정광수(바르나바)의 집에서 사흘 밤낮에 걸쳐 첨례와 강학에 참여했다.

집 벽에 비밀통로를 뚫고 신자들과 교류했다는 복자 홍익만. 탁희성 작.

1801년 박해령이 내리자 복자는 안산에 사는 사촌 매부의 집을 방문하고, 여주 숙모의 집을 찾는 등 박해를 피해 돌아다녔다. 이렇게 떠돌던 중 많은 이가 체포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복자는 산골에 숨어 지내다 이천의 친구 집에 머무르면서 박해를 피했다.

복자는 이런 피신생활 중에도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다. 복자는 교회서적을 늘 지니고 다녔고, 친구에게 교리를 전하기도 했다. 또 윤유일의 사촌인 윤구손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교회 소식을 교류하기도 했다.

그렇게 박해를 피해 신앙생활을 수개월 가량 이어가던 중 복자는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복자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신자들을 밀고하지도, 배교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떳떳하게 이야기할 뿐이었다.

복자는 박해자들 앞에서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있으니 마음을 바꿔 신앙을 버릴 생각이 없다”면서 “죽음밖에는 따로 진술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복자는 이렇게 신앙을 증언하다 사형 판결을 받고, 1802년 1월 29일 서소문 밖 새남터에서 동료 신자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양근성지

복자가 태어나고 자란 양근은 초기 한국교회 신앙선조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퍼져나간 곳이다. 양근성지(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물안개공원길 37)는 양근 지역의 신앙선조와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문의 031-775-3357 양근성지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