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6-27 수정일 2017-06-27 발행일 2017-07-02 제 3051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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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서 조선에 파견돼 활동한 첫 사제 

복자 주문모 신부 초상화.

복자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조선의 신자들을 위해 중국에서 파견돼 한국교회에서 활동한 최초의 사제로 박해시기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성사를 집전하다 순교했다.

복자는 1752년 중국 장쑤성의 쿤산(崑山)현에서 태어나 부모를 잃고 고모 슬하에서 성장했다. 천주교 신앙을 진리라 여긴 그는 베이징교구 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 베이징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 밀사를 통해,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에 신앙심이 깊고 조선 사람과 닮은 복자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성무에 관한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복자는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고, 1794년 12월 24일 밀사들과 함께 조선에 입국했다. 복자는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머물면서 한글을 배우고, 1795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조선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복자의 입국 사실이 탄로 났고, 복자는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해 비밀리에 성무를 집행했다.

복자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신자들을 만나고 성사를 집전했다. 신자들의 교리공부와 전교를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단체인 ‘명도회’를 조직했고, 교리서도 만들었다. 복자는 박해의 위험 속에서도 경기도 여주와 양근, 충청도의 공주, 연산, 온양, 내포, 전라도의 전주 등을 순회하며 신자들을 만났다.

당대 신자들은 복자가 “일에 지칠 줄을 몰라 먹고 자는데 필요한 시간을 겨우 낼 정도였다”면서 “자주 금식과 극기를 행하고 자기 본분에 온전히 헌신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게 6년에 걸친 복자의 활동 덕분에 조선교회의 신자 수는 1만 명에 달하게 됐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복자에게도 고통이 닥쳤다. 박해자들은 신자들에게 복자의 행방을 자백하도록 강요했고, 형벌과 사형을 집행했다. 복자는 자신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귀국하기 위해 압록강까지 갔지만, 다시 발길을 돌려 한양으로 돌아왔다.

복자는 관아를 찾아 “내가 당신들이 사방에서 헛되이 찾는 그 신부”라면서 자수했다. ‘양떼와 운명을 같이해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복자는 형벌 중에도 침착했고, 모든 질문에 신중하게 대답했다. 복자는 박해자들에게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면서 “남이나 나라에 해를 끼치는 일은 십계에서 엄금하기에 절대 밀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복자는 목을 베어 군문에 매다는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1801년 5월 31일 새남터로 끌려가 49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증언에 따르면 복자의 형이 집행되자 청명하던 하늘이 어두운 구름으로 가득차고 갑자기 비바람이 불어 앞을 분간할 수 없었지만, 집행이 끝나자 곧바로 구름이 걷히고 무지개가 먼 하늘에 떠 서북쪽으로 흩어졌다고 전해진다.

어농성지에 있는 주문모 신부의 의묘.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 - 어농·양근성지, 여주성당

교구 내 성지 중에는 어농성지(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로62번길 148)가 복자를 현양하고 있다. 성지는 복자를 조선교회로 입국시킨 윤유일(바오로) 집안의 선산으로 복자의 의묘와 동상을 세우고 현양하고 있다.

또 복자가 신자들을 만나며 성사를 집전하던 양근의 양근성지(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물안개공원길 37)와 여주의 여주성당(경기도 여주시 우암로 5)에서도 복자를 기억할 수 있다.

※문의 031-636-4061 어농성지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