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이야기]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
입력일 2017-06-20 수정일 2017-06-20 발행일 2017-06-25 제 3050호 16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부족함 인정하면서 하느님께 나가야

찬미 예수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직도 신학교 방학이 ‘삼일이나’ 남았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이 글을 읽으실 때면 아마도 방학이 시작한 이후겠지요. 지난주 글을 쓰면서, 이번 학기 동안 유난히 학생들과 함께하는 기도 시간에 참여하지 못한 제 모습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글의 말미에, 부끄러운 제 모습에 낙담하고 실의에 빠져있기보다는 ‘그래, 이게 지금의 내 모습이야’라고 인정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어떠세요? 제가 드린 말씀에 공감하시나요? 아니면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인정한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빠져나갈 여지를 마련해주는 자기합리화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루카 복음 19장에는 자캐오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세관장인 자캐오가 어느 날 길에서 예수님의 일행을 마주치게 되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려 했지만 키가 작아서 볼 수 없자 주위에 있는 나무에 올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자캐오의 마음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자캐오는 어떤 마음으로 나무에 올랐을까요? 예수님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마냥 설레던 마음이었을까요? 아니면 또 다른 마음이었을까요?

복음서가 전하는 것처럼 자캐오는 세관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세관장, 곧 세리라고 하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로마 제국에 충성하며 동족의 피를 빨아 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으로 여겨졌었고 그래서 동족들로부터 비난받던 이들이었습니다. 자캐오가 어떤 성격의 사람이었는지는 복음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정말로 뻔뻔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도 이런 주위의 시선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웬만하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캐오도 예수님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한 마음 그리고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거리에서 마주치게 된 예수님을 보려고 애를 썼고,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자 이를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던 거죠.

그런데 이처럼 나무 위로 올라가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캐오가 왜 나무 위로 올라갔죠? 네, 키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키가 작아서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나무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자캐오가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간에, 자신의 키가 작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난 키가 작아서 볼 수 없기 때문에 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봐야 해. 내겐 그게 필요해’ 하고 올라가는 것이죠. 그런데 자신이 키가 작은 것이 싫고 또 키 작은 것을 굳이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어쩌면 나무 위로 올라가려던 생각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에이, 예수라는 사람이 뭐 대단하다고 나무 위까지 올라가서 보나. 난 안 봐도 돼’‘나무 위에 올라가도 어차피 잘 안 보일 거야. 가까이서 보는 게 아니니까’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그 속마음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망은 분명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마음이 그만큼 컸기에, ‘작은 키라고 놀림 받아도 어쩔 수 없어’ 하면서 올라갔던 것이죠. 예수님을 향한 열망에서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용기입니다.

이런 자캐오를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자캐오가 정말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구나. 그래서 저렇게까지 해서라도 예수님을 보려고 하는구나. 참 열성이 대단하다’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세리들은 동족들로부터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비난받는 사람들이었죠. 그래서 눈에 띄게 나무 위에까지 올라간 자캐오를 보면서 사람들은 아마도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수군댔을 것입니다. “어이구! 저 나무 위에 올라간 것 좀 봐. 세리 주제에 그래도 예수님 이야기를 어디서 듣긴 들었나 보지?” “세리 짓을 하면서도 구원은 받고 싶은가 봐?” “저렇게 나무에 기어 올라간 걸 보면 그래도 자기 키가 작은 줄은 아나 보네?”

이런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자캐오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지 않았을까요? 또 자기 스스로도 세리라는 직업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도 느끼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부족한 모습, 죄스러운 모습, 자기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 때문에 나무에 올라가는 것을 포기했다면,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구원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내가 키가 작으니까,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세리니까 그런 것부터 해결하고 나서 예수님을 보러 가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모습 그대로,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욕을 먹으면 먹는 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얼굴을 꼭 봐야겠다. 내 못난 모습이 다 드러나더라도, 그게 나니까, 나무에 기어올라서라도 예수님을 봐야겠다.” 그렇게 자캐오는 나무에 올랐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살아가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스스로의 모습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싶고 이웃을 사랑하고 싶고 또 세상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현실에선 그렇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너무나 자주 보게 되죠. 나의 이기심이나 게으름, 스스로 느끼는 열등감과 다른 이에 대한 시기심, 이런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자책 그리고 죄스러움까지.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이런 모습들의 대부분은 ‘나 중심성’에서 나오는 모습들입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지니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 안에서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모습들이라는 것이죠. 그런데도 내가 가진 부족함, 약함을 다 정리하고 치우고 완벽하게 한 후에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에게 실망하고 스스로를 질책하고, 그래서 더 애를 쓰지만 여전히 안 되고 그래서 또 실망하고. 결국 자꾸만 내 부족함, 약함, 죄스러움을 보게 만드는 신앙의 삶이 점점 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쉽지 않은 욕구들 다 치워 없애고 내 부족함 채우느라 진을 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약하고 모자란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이런 내 모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입니다. 키가 작은 내 자신을 싫어만 할 것이 아니라, 키가 작으니까 나무에 오르는 것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키가 작고 죄인인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