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복자 손경윤 제르바시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6-13 수정일 2017-06-13 발행일 2017-06-18 제 3049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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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채 술집으로 꾸미고 안채에선 신자들에게 교리 교육
1790년 최필공 통해 입교 후 수차례 체포
배교해 석방되고도 이내 신앙생활 재개
회장직 수행하다 밀고돼 새남터에서 참수

복자 손경윤 제르바시오 초상화.

손경윤(제르바시오) 복자는 약방을 운영하면서 박해시기 신자들의 영육간의 건강을 챙긴 순교자다.

복자는 1760년 한양의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안국동에서 약방을 운영하면서 생활했다. 1790년 최필공(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복자는 여러 차례 형조에 체포되는 고초를 겪었다.

입교한 다음해에는 신해박해로 최필공(토마스), 최인길(마티아)과 함께 체포돼 갇혔다가 석방됐고, 1796년에는 다시 체포돼 여러 차례 형벌을 당한 뒤 배교의 말을 하고 석방됐다.

하지만 복자는 곧바로 자신의 배교를 뉘우치고 신앙생활을 회복했다. 신해박해로 형조에 잡혔다 돌아온 복자는 아우 손경욱(프로타시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실천했다.

마찬가지로 1796년 체포되고 풀려난 뒤에도 회개하고 신자들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영적·물적으로 적극 도왔다.

주문모 신부가 복자를 회장으로 임명하자, 그는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고,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쳤다. 틈틈이 필사한 교리서를 신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박해가 점점 더 심해지자 복자는 큰 집을 구입해 바깥채는 술집으로 꾸미고 안채는 신자들이 교리를 배우는 곳으로 삼았다. 외부가 외교인들이 술을 마시는 곳이었기에 포졸들이 쉽게 눈치챌 수 없었고, 덕분에 신자들이 안심하고 교리를 익힐 수 있었다.

양근성지.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복자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밀고됐다. 복자는 이 사실을 알고 경기도 양근으로 피신해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자신 대신 가족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진해서 포도청을 찾아갔다.

복자는 갖은 형벌과 문초 속에서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지만, 다시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으로 시련을 극복했다.

복자는 사형 선고를 앞둔 최후 진술에서 “천주교 때문에 여러 번 체포된 후에도 나라의 금령을 무시하고 마음을 바꿀 줄 몰랐다”면서 “신자들과 같이 모여 교리를 공부했고, 널리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했다”고 증언했다.

복자는 42세의 나이로 1802년 1월 29일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복자의 신앙은 자녀들에게도 이어져 복자의 딸 손(막달레나)과 사위 장사광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양근 감옥에서 순교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