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방주의 창] 공감과 연대 / 유희석 신부

유희석 신부 (수원가톨릭대학교 총장)
입력일 2017-06-13 수정일 2017-06-13 발행일 2017-06-18 제 3049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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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어느 심포지엄에서 종교의 ‘자비’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공감은 내적 자비이고 연대는 외적 자비라는. 오랜만에 철학자 흉내를 좀 냈다. 요컨대 현대의 종교가 갖추어야 할 것으로 ‘공감’과 ‘연대’가 있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가지이지만 무엇보다도 공감과 연대를 빼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표현도 그랬다. “고통 앞에 중립이 없다”고. 공감을 말하고 연대를 주장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 때문이다. 진실을 은폐하지 않기 위해서다. 삶이 팍팍할수록 약자일수록 공감능력을 키워 연대해야 살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니까 공감과 연대는 살기 위한 당연한 행동인 것이다. 협동을 말하고 협치를 운운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공평하거나 평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불평등과 부당함을 잠재우려면 반드시 공감능력이 필요하고 연대정신으로 협력해야 한다. 이점에서 한국사회는 여전히 공감을 필요로 하고, 연대할 것이 많아 보인다.

그런데 공감을 이끌어내려면 설득력이 요긴하다. 사안이 긴박하고 중요할수록 설명이나 설득도 절박해야 한다. 상대방의 공감을 이끌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절실한 것이라면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모두와 소통하기 위해서이다. 소통하는 사회가 공감하는 사회이고 연대하는 사회라고 할 것이다. 그게 바로 대동사회일 것이다. 사실 누군가 함께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거리다. 혼자의 힘은 약할 수밖에 없어서 공감하는 이들이 힘을 합해야 불가능을 줄일 수 있다. 이를 우리는 광화문 광장에서 확인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공감하고 어떻게 연대할까. 딱히 정해진 것은 없다. 절박한 상황과 피해가 발생되는 자리라면 언제든지다. 공감은 따지고 보면 ‘역지사지’에서 나온다. 그래서 거기선 인간다움을 느낀다. 반대로 공감이 필요할 때 공감하지 못하면 허탈해진다.

사실 예수님의 활동은 모두 공감과 연대의 행동이었다. 그분의 공감은 무엇보다 측은지심이었다. 이점에서 예수님이 왜 몸을 낮추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라고 생각한다. ‘5·18’이나 ‘세월호’를 보고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외면이거나 이해관계 때문일 것이다. 혹자는 공감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기만 하면 된다. 다만 남의 일로 여기는 것이 문제다. 공공의 유익함을 위해서라면 혹은 일방적인 피해를 당했다면 그 해결은 깊은 공감과 끈끈한 연대에 달려 있다. 슬픔에 빠진 이웃을 홀로 있게 해선 안 된다. 그를 외롭게 돌려놓는 것은 우리 모두가 공범자를 자처하는 것과 같다.

또한 공감이 결실을 맺으려면 반드시 연대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공감과 연대의식이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마더 데레사가 콜카타를 찾아간 이유도, 토마스 머튼이 굳이 수도원을 찾아간 것도 세상과 등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대신 소통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도 어떤 면에서는 공감이고 연대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뜻에 공감하는 이들의 모임이고, 그분의 뜻으로 연대하는 이들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행복을 추구하지만 현실의 모습은 꼭 그렇지 않다. 물론 사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사회가 부추긴 측면이 적지 않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는 억울함과 분노가 더 많아 보인다. 모든 슬픔은 참아내는 것도 미덕일 수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이 불의할수록 인내가 아닌 주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공감할 수 없을 거라고 지레 포기하는 것은 악습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시민의 불복종’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실제로 모두가 공감하기는 쉽지 않고, 연대하기란 더 어렵다. 하지만 절실하다면 문제는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시인 김춘수의 ‘꽃’은 낭만 그 이상의 것이 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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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석 신부 (수원가톨릭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