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글로벌 칼럼] (5) ‘사제직의 모든 것’ / 살바도르 아괄라다 신부

살바도르 아괄라다 신부 (글라렛 선교수도회)rn필리핀 글라렛 선교수도회 소속 사제로, 현재
입력일 2017-04-30 수정일 2018-09-19 발행일 2017-05-07 제 3043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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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백성 성화 위해 일하는 ‘종’

지난 성 목요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에 거주하는 수많은 사제들과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유 축성 미사를 공동집전했다.

전 세계 사제들은 성유 축성 미사 중, 주교 앞에 엎드려 사제서품식에 했던 사제직의 서약을 갱신한다. 교황 앞에서 사제서약을 갱신하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자 은총이었다.

나는 내 성소가 하느님 선택의 산물이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열매 맺은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또한 나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인가를 위해, 훨씬 더 큰 계획을 위해 태어나 부르심을 받고 사제가 됐다고 믿는다.

사제직의 의미란 무엇일까? 나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신학교 시절 한 학기 동안 성품성사에 관한 과목을 공부한 적이 있다. 해답을 찾기 위한 한 방법으로 성사의 사효성과 인효성 사이의 신학적 차이를 파고 들었다.

성사의 사효성이란 성사는 집전자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효력을 지닌다는 말이다. 이 원칙에 따르면, 집전자의 영적 상태와 상관없이 성사가 올바른 형태로 교회의 지향을 가지고 이뤄졌으면 유효하다.

이러한 성사 고유의 효력은 그리스도께서 집전자에 상관없이 성사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사제들의 성화 정도에 휘둘리지 않고 각자의 성화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사제의 성화와는 별개다. 성화를 위한 사제들의 노력 정도는 성사의 효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들은 교회의 사목자들에게 영적·전례적·사목적 이유로 자신을 성화할 것을 요청한다. 바로 성사의 인효성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은 교회의 성화가 사제의 성화와는 완전히 관련 없다고 가르친다.

왜 그럴까? 사제로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셨던 말씀을 더욱 더 확신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신비로운 방법으로 성품된 사제들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

성사와 성사의 사효성은 교회의 삶에 하느님의 은총이 마르지 않게 하고 있다. 아무리 연약하고 자격이 없으며 죄 많은 사제라도, 하느님의 은총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품된 사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남긴 말씀을 계속해서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 사제들이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죄 많고 하찮은 나를 통해 백성들의 성화를 이끌고 계시다는 사실은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결국, 우리 사제들에게 필요한 말은 단 하나다. 우리의 사제직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 백성을 위한 것이란 말이다. 하느님은 우리 사제들을 우리들의 성화가 아닌 교회의 성화를 위해 부르신다.

우리는 교회의 다른 사목활동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진정 교회의 종이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종이다. 우리는 타인과 교회, 온 인류의 성화를 위한 일에 꼭 필요하며 이들의 처분에 따라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따르는 주님처럼, 우리는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므로 개인의 일은 언제나 뒤로 미루고, 자신보다는 공동체의 요구를 앞세워 백성들이 바라는 사목적·영적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사제직의 모든 것이다.

살바도르 아괄라다 신부 (글라렛 선교수도회)rn필리핀 글라렛 선교수도회 소속 사제로,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