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신앙생활의 기쁨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
입력일 2017-04-25 수정일 2017-04-25 발행일 2017-04-30 제 3042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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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향한 삶 살 때 ‘참행복’ 누려
희생·극기는 자신에게 득 되는 행위
계명 통해 더 큰 자유 얻을 수 있어

찬미 예수님.

지난주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삶의 원리였죠?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은 늘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놓여있을 수밖에 없다는 원리였습니다. 그 존재의 첫 시작이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된 때문이기도 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바라볼 때에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또 다른 원리는, 인간 존재의 시작만이 아니라 그 끝도 하느님을 향해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인간을 당신과의 친교로 불러주시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중이고, 하느님께서도 이런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께로 데리고 가신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중의 일부만이 이러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듣고 그에 응답하고 있죠.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영성 곧 그리스도교 삶의 원리는, 자기 자신의 삶 전체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늘 알아들으면서 그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네?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고요? 네, 맞습니다. 제가 어떤 새로운 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우리 각자가 지금껏 살아오고 있는 신앙생활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신앙인이 따라야 할 삶의 원리이고, 이러한 원리(영성)를 따라 사는 삶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곧 ‘영성생활’이 되는 것이죠.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구체적인 모양새나 그 여정 안에서 겪게 되는 일들에 대해서 앞으로 더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보다도, 이처럼 그리스도교 삶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 곧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오랜 시간을 본당이라는 사목 현장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면서는 무엇보다 먼저 본당에서 생활하고 싶었습니다. 언제 어디에 있어도 사제라는 신원은 달라지지 않지만, 그래도 사제는 하느님과 신자들을 이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만큼, 본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생활할 때 사제로 살아가는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바로 신학교로 들어오게 되었지요.

신학교에서 생활하며, 그래도 가끔은 여느 본당에 미사를 집전하러 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아주 신이 납니다.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드리고, 신자분들과 함께 하느님 말씀을 듣고 또 강론을 하고. ‘역시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있어야 해!’ 미사 드리는 제 얼굴이 싱글벙글합니다. 그런데 제대에 서서 신자분들을 바라보면, 그 표정이 또 다양합니다. 밝은 얼굴로 웃고 있는 분들도 계시지만, 또 어떤 분들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 무표정하게 계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지치고 힘든 표정으로 자리에 계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노라면, 저만 혼자 좋아서 이렇게 웃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되죠. 그리고는, 미사 안에서 느끼는 이 기쁨을 어떻게 신자분들께 전해드릴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작게는 미사 중에 느끼게 되는 고민이기도 하지만, 크게 보면 우리 신앙생활 전체를 보면서도 하게 되는 고민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게 무얼까?’ ‘신앙생활의 기쁨이 어디에 있을까?’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신앙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 얼마만큼의 의미를 줄까 하는 부분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리고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기쁘신가요? 아니면,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다 그래야 한다고 하니까,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신자로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어떤 의무나 계명 혹은 짐으로 느껴지십니까?

지금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부활의 기쁨 속에 있지만, 이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사순시기를 보냈지요. 그런데 이 사순시기를 보내는 마음이 어떠셨습니까? 사순시기하면 쉽게 떠오르는 것이 ‘참회’ ‘보속’ ‘극기’ ‘절제’ ‘희생’과 같은 단어들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도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고 또 유혹에 맞서 극기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하도록 권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도 많은 분들이 각자 할 수 있는 절제와 희생의 내용들을 정해놓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시죠.

그런데 이런 보속과 절제, 극기의 행동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우리가 이런 행동들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느님께 득이 될까요? 반대로, 우리가 희생과 극기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해를 입으실까요?

사실 우리가 아무리 이러한 삶을 산다고 해도 그것이 하느님께 득이 되거나 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니까요.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죄인의 회개’를 바라시는 이유는, 그럼으로써 그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회개’가 하느님께 득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신에게 득이 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루카 15,1-32 참조)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계명을 무거운 짐으로 이고 힘들게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계명들을 통해서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죽어서야, 저 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나 구원을 얻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의미, 그리스도교 삶의 원리를 따라 사는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께로 나아가는 이유는, 그것이 하느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도리이거나 의무여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느님을 향해 길을 갈 때 우리가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우리가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다면, 신앙생활 안에서 부담이나 짐스러움을 느끼기보다는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을 더 충만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원리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로마 6,23).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