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대전교구 순성본당, 신앙선조 못 다 이룬 꿈 실현할 새 성당 짓다

최용택 기자
입력일 2017-04-18 수정일 2017-04-18 발행일 2017-04-23 제 3041호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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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 배관겸과 공동체 이뤘던
옛 교우 숯 굽던 가마터 자리
정성용 주임신부와 신자들 합심
5월 13일 입당 목표로 건립 중

한창 건축이 진행 중인 대전교구 순성성당. 순성은 내포지역에서 처음으로 경당과 사제관이 지어졌던 곳으로, 지역 신자들은 힘을 합해 신앙 선조들이 꾸었던 꿈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충청남도 당진시 순성면과 면천면을 관할하는 대전교구 순성본당(주임 정성용 신부). 지난 2015년 1월, 신합덕본당을 모본당으로 분리된 신설본당이다. 6개 공소가 하나로 뭉쳐 본당을 설립했으며, 현재 교적상 680여 명의 신자가 소속돼 있다.

신설본당이지만, 이 지역 신앙의 씨앗은 초창기 한국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됐던 시절, 당시 충청도 당진의 진목(현 석문면 장항리) 출신인 복자 배관겸 프란치스코가 입교했다. 배관겸은 1791년 경 면천의 양제(현 순성면 양유리)에서 교우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뤘다.

1794년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이듬해부터 전국의 신앙공동체를 순방하기 시작했다. 배관겸은 강완숙, 원시장 등의 교우들과 함께 1798년 양제 마을에 미사를 드릴 경당과 주 신부가 기거할 작은 사제관을 마련했다. 하지만 한 밀고자가 포졸을 이끌고 마을로 들이닥쳤다. 배관겸은 체포됐고, 홍주, 청주 병영으로 이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배관겸은 굳건히 신앙을 지키다 매질을 못 이기고 결국 1800년 1월 7일 순교했다.

이후 신유박해(1801년)의 광풍으로 경당과 사제관은 파괴되고 남아있던 신자들마저 뿔뿔이 흩어졌다. 신자들은 산 속으로 들어가 정착, 가마와 숯을 구워 만들어 팔았다. 이웃의 솔뫼성지와 신리성지 등 유명 인물 중심의 성지가 들어서며, 순성 지역 신앙의 역사는 이렇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순성본당 설립은 온전히 주임 정성용 신부의 의지로 이뤄졌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에 대한 답례로 정 신부는 교구에 본당 신설을 요청했다. 당시 신합덕본당 주임이던 정 신부가 새 본당 주임으로 소외된 공소 신자들에게 다가가겠다고 교구에 요청하자, 교구는 본당 신설을 허가했다.

현재 순성본당은 5월 13일 입당을 목표로 성당 건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6년 사제관과 교육관 완공에 이어 올해 본당은 건면적 330㎡ 규모의 작고 아담한 성당을 짓고 있다. 외골격 공사를 마치고 현재는 첨탑과 내부 공사를 진행 중이다.

순성본당이 설립될 당시에는 기존에 있던 순성공소 자리에 새 성당을 지을 계획이었다. 기존의 공소부지와 주변 땅을 더 매입해 성당을 세울 요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주변엔 큰 공장들이 있는 등 환경이 좋지 않았다. 신자들의 접근성도 떨어졌다. 대지를 물색하던 본당은 순성면사무소 인근 봉소리에 대지 3300㎡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인근에 학교와 관공서 등이 밀집된 요지였다.

새로 마련한 부지에서도 우연찮게 신앙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제관을 건축하기 위해 토목공사를 하던 중 본당은 이 땅이 100년 전 신자들이 순성장터에 내다 팔던 옹기와 숯을 만들던 가마터였던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기록을 되짚어 100년 전이었던 1917년, 당시 신자들은 이 땅에 봉소공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을 확인했다.

정성용 신부는 “우리 본당은 220년 전에 신앙의 선조들이 꾸었던 꿈, 100년 전 신자들의 꾸었던 소박한 신앙 공동체의 꿈이 이제야 이뤄지는 것”이라면서, “희망이 없어 보이는 노인들만 가득한 성당에서도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