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하필이면 저에게…

이연세(요셉) 대령 (육군 항공작전사령부)
입력일 2017-04-04 수정일 2017-04-05 발행일 2017-04-09 제 3039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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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으로 꽉찬 밤, 한강변을 따라 시원하게 뻗은 올림픽대로를 달려갑니다. 잠실을 지나자 우뚝 솟은 올림픽대교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상단의 횃불모양 조형물은 한강의 물결과 어우러져 온갖 빛의 향연을 펼칩니다. 그러나 저는 이 환상적인 광경을 볼 때마다 애잔한 슬픔을 느낍니다.

2001년 5월 29일 오후 4시55분, 올림픽대교 상단에 횃불모양의 조형물을 올려놓던 CH-47(시누크)헬기가 추락했습니다. 이 사고로 조종사 2명과 기관사 1명이 사망하고 헬기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졌습니다. 이 참혹한 장면은 한 시민의 동영상에 고스란히 담겨져 국내는 물론 해외토픽으로도 방송됐습니다.

차라리 충격적인 사고 장면을 보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저는 TV로 수없이 재생되는 사고 장면을 보면서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10여 일 후 추락한 헬기 대대의 대대장으로 취임하도록 명령을 받아놓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받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저는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주기종(UH-1H)도 아닌 항공대대의 대대장으로 내정된 것도 부담인데, 대형사고까지 주시면 제가 어떻게 부대를 지휘할 수 있겠습니까?’ 대대장 취임일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불안감과 스트레스로 입안은 깔깔했고 잠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대대장 취임을 앞둔 마지막 주일, 온 가족이 일찍 성당에 갔습니다. 저는 하느님께 시련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주실 것을 간절하게 기도드렸습니다. 미사 내내 ‘사고 후속조치와 장병들의 떨어진 사기를 어떻게 진작시킬 것인가?’를 생각하느라 분심이 가득했습니다. 신부님의 강론이 중간쯤 지났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지금이 최악의 순간 아닌가! 대대 지휘를 잘 못한다고 해도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큰 소명을 주신 것은 아닐까.’

이렇게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나니, 놀랍게도 그동안 머리를 짓눌렀던 불안감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래, 한 번 해보자’라는 용기가 솟았습니다.

2001년 6월 9일, 수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우려 속에서 대대장에 취임했습니다. 취임과 동시에 순직자의 현충원 안장식부터 추모비 제막까지 사고의 후속처리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웃음이 사라진 대대원들과 한 몸이 돼 땀 흘리며 운동하는 한편, 전투력 보강에도 전력을 다했습니다. 대대원들은 전우를 잃은 아픔 속에서도 그들의 값진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더욱 분발해 6개월여가 지나자 정상적인 대대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올림픽대교를 지날 때마다, 그 당시 절박했던 마음을 되돌아보며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저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항공기 추락사고로 고인이 된 세 분의 전우들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이연세(요셉) 대령 (육군 항공작전사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