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신문이 만난 사람] 영화 ‘재심’의 실제 주인공 박준영 변호사

정리 서상덕·조지혜 기자
입력일 2017-02-27 수정일 2017-02-28 발행일 2017-03-05 제 3034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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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만 챙겨선 정의 실현 어려워… 타인 고통에 관심 가져야”
2008년부터 재심사건 맡아서 활약
파산 등 경제적 어려움 겪으면서도 억울하게 누명쓴 이들 곁 지켜
“측은지심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
선한 사람들이 사건 해결에 큰 도움
신의 존재·섭리 어렴풋하게 느껴

영화 ‘재심’은 대한민국을 뒤흔든, 목격자가 살인범으로 뒤바뀐 사건을 소재로 벼랑 끝에 몰린 변호사와 억울한 누명을 쓰고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이가 진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재진행형 휴먼드라마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 박준영 변호사는 ‘재심전문 변호사’로 알려져 있다. 재심을 통해, 영화의 소재가 된 2000년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을 비롯해 2007년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1999년 삼례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사건 등을 무죄로 이끌어냈다.

“진실을 말하는 용기가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말하는 박 변호사와 대담을 통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할 정의의 길에 대해 생각해본다.

‘재심 전문’이라 불리는 박준영 변호사는 사건 해결 과정들을 떠올리며 “‘측은지심’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사진 서상덕 기자

■ 대담 : 장병일 편집국장

■ 일시 : 2017년 2월 24일

▲장병일 편집국장(이하 장 국장): ‘사회 정의’가 사회적 담론이 된 건 참으로 오래된 일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정의롭지 못하다’란 말이 대세다. ‘과거보다 조금은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됐다’고 할 수 있을지.

‑박준영 변호사(이하 박): 더 정의롭게 됐다고 말하기 어렵다. 겉으로는 정의로운 것 같지만 예전보다 더 개인주의적이고 물질만능주의 시대가 된 것 같다.

옳은 가치가 정의라고는 하지만 수많은 사회적 현상 속에서 나만, 내 주변만 위하는 것은 정의롭다고 할 수 없다. 지금은 정직, 성실 등 돈 이외의 가치가 무너져 버린 세상이다. 더 정의롭지 않은 사회가 된 것 같다.

사법정의도 마찬가지다. 고문·폭행이 없어져서 바뀌었다고 볼 수 있지만, 예를 들어 헌법상 ‘진술거부권’이 방어권이 부족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이들을 위해 보장돼야 하는데 최순실이 행사하고 있다. 법의 취지에 따라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고 본다. 그 희망을 ‘스토리펀딩’을 하면서 보았다. 나같은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지만 스토리펀딩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정의를 결집시키는 시스템이 없을 뿐이지 정의가 분명히 존재하고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실제 재심사건이 그렇다. 사건 해결과정에 힘 있고 잘난 이들이 도움을 준 게 아니다. 삼례나라슈퍼 사건의 진범, 피해자, 이 사건을 알린 천주교 교화의원 등 연대의 힘으로 이룬 결과다. 그것을 보면 정의에 대한 열망과 갈망이 있다고 본다.

▲장 국장: 정의와 천주교는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정의는 관용과 존중, 소통과 양보 그리고 서로 손실감과 박탈감이 없는 타협의 결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비춰 봐도 우리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 부르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정의를 이루는 방법은 아는데,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변호사님은 ‘측은지심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말로 공감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는데….

-박: “당신을 불쌍하게 느낍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남의 고통에 다가설 때 그 사람의 고통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같이 슬퍼할 때 힘이 나온다. 가장 큰 원동력은 측은지심이다.

측은지심이 발현되는 과정을 삼례나라슈퍼 사건에서 봤다. 진범이 나선 계기는 ‘자기 때문에 옥살이를 한 사람들의 인생이 너무 기구하다’는 거였다. 피해자도 자신이 당한 피해로 인해,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을 측은하게 여겼다.

오거리 택시 살인사건도, 진범을 잡은 형사는 동료경찰의 잘못을 지적하고 경찰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고 한다. 다 측은지심이다.

교황님 말씀 중 사과, 관용, 소통 등이 있는데, 선의를 통해서 관용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내 생각엔 관용은 사과가 전제된 것이어야 한다. 먼저 사과할 준비가 안 된 사람한테 선의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장 국장: 사회적 약자, 소외된 이에 대한 배려가 강조되고 있지만 만족스럽진 못한 것 같다. 억울함이 많은 사회를 ‘건전한 사회’라고 부를 순 없다. 법 형평성이 계속 문제가 되고 있지만 법을 만드는 사람이나 집행하는 사람이나 대중들이 갖고 있는 법감정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는 것 같다.

-박: 법률가가 해석할 때 법의 의미는 사회적 합의다. 과연 우리 사회의 법이 합의 과정, 공동체의 여러 가치들을 제대로 반영하는가.

또 공평을 논하는 사람들이 많다. 법은 제정과정부터 기득권 이익이 반영돼 있다. 권력자의 힘이 작동해서 그들의 이익을 반영하는 법이 만들어지는데 어떻게 법이 공평한가.

우리 사회는 배분적 정의가 실현돼야 한다. 법도 의도적으로라도 배려해야 한다. 법 제정 과정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가치대로 사회적 합의를 하지 못했다면 집행 과정에서라도 배려해야 한다. 제도에서 소외받고 있는 가치에 대해 얼마나 배려를 하고 있느냐.

우리 사회는 억울한 사람이 배려를 받기 힘든 구조다. 법률구조공단, 무료법률상담센터 등 큰 규모의 법률기관이 있지만 나에게 사람들이 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억울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시스템은 밑바닥에서부터 경험이 바탕이 돼 문제제기, 협의가 되는 과정에서 공론화가 되는 상향식이 아니라, 위에 있는 사람들이 추정하고 상상해서 내리꽂듯이 제도가 만들어진다. 제도 개선이 안 되는 이유는 개선할 능력과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재심사건, 탈북민 사건을 하다가 새벽까지 재판을 한 적이 있다.

“이렇게 내가 공익사건을 하는데 다들 칭찬을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하고 착각한 적도 있다. 새벽 3시까지 재판을 하면 경호원, 법원 직원에게는 고통의 시간이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행동조차도 누군가를 소외시킬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한 배려가 없다.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민원실에 가는데 공무원들은 공감을 하고 싶어도 일에 치여서 고통스럽다. 그런 고통을 배려하지 않으면서 보완하겠다는 얘기가 나오긴 힘든 것이다.

▲장 국장: 신념대로 산다, 의지대로 산다, 생각대로 산다…,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변호사님은 그런 사람들 중 한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들의 변호사’로 불러달라는 말씀을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하셨는데, 그 의미는.

-박: 재심전문 변호사라는 호칭이 부담스럽다. 전문 변호사라 하면 사람들이 기대를 갖는다. 그런데 재심이 쉽지 않다 보니 부담이 된다. 인권변호사라는 말도 부담스럽다. 내가 낸 책 제목이 ‘우리들의 변호사’다. 억울한 이들 속에서 ‘우리들의 변호사’가 되고 싶고 또 우리들의 변호사로 불리고 싶다.

▲장 국장: 삶의 롤 모델이 있으시다면….

-박: 존경하는 법조인으로 조영래 변호사가 있지만 나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큰 감동을 받은 인물은 난민을 구한 전재용 선장이다. 공해상에서 표류하는 난민을 보고 그들을 구했다.

본국에서는 처리 절차가 복잡하니 그냥 지나치라고 하고, 음식물 등을 나눠 먹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배들도 그냥 지나쳤다. 그래도 선장은 난민을 태우고 돌보면서 한국으로 데려왔다. 그 뒤 국정원에 불려가서 불이익을 받았다.

난민 일부는 미국으로 가고 세월이 흘러 그를 만나러 왔다. 그들이 공항에서 상봉을 하는데 눈물이 많이 났다. 그 상봉 장면에서 난민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만나는데 정말 감동적이었다. 고통 앞에서 침묵하지 않은 공감과 연대가 낳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사법고시 공부도 누군가 돕기 위해서 시작한 게 아니었다. 군복무시절 대대장 운전병을 했었다. 대대장은 30대 중반 중령이었는데 멋있어 보였다. 그의 일상을 보며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접촉을 많이 하고 그걸 통해서 감흥을 받는다. 그리고 자극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하게 된다.

꼭 동기나 목적을 정해놓고 시작하지 않더라도 일단 시작하면 그 과정에서 의미 있는 가치를 발견할 수도 있다.

▲장 국장: 종교, 또는 종교인이 우리 사회 안에서 지녀야 할 모습, 삶의 태도는 어떠해야 된다고 생각하는지.

-박: 신앙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내 행동을 성찰하고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소중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 기독교는 형식에 너무 매몰된 것 같다. 왜 일요일에 수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인원이 꼭 그 자리에 모여 있어야 하나. 그 인원이 종교 정신에 맞는 활동을 한다면 성경 구절 이상의 효과가 있고 그걸 통해서 변화가 있을 것이다.

세상이 발전하려면 편한 관계만 지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의도적으로라도 불편한 관계를 늘려가는 것이 의미가 있다. 교회에 나가서 꼭 예배를 하지 않더라도 다른 형태에서 종교인 역할을 실천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교회의 외형이 화려할 때 사회 정의를 이루는데 방해가 된다. 약자들이 그 건물 안에 못 들어간다.

▲장 국장: 평소 선의를 지닌 많은 사람들, 특별히 종교인들과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박: 사필귀정을 믿는다. 재심사건을 진행하면서 선한 연대가 결합되는 과정을 보고 어떻게 저런 우연이 계속 쌓일 수 있을까 많이 생각했다. 우연이 쌓이는 것을 보며 인간이 알 수 없는 신의 존재가 있다고 여겼다.

신의 섭리를 믿는다는 것, 세상이 발전하고 세상이 선한 방향으로 간다는 가치를 믿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장 국장: 앞으로의 계획은?

-박: 요즘에 계획을 갖고 살아본 적이 별로 없다. 이제까지 했던 일을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변질되는 과정일 것이다. 한동안은 해 온 일을 계속 열심히 하려고 생각한다. 잘할 수 있는 일들을 돈 버는 일에만 쓴다면 자신에게도 사회에도 불행한 일일 것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고도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나를 보고 다른 이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의미 있는 선례로 남고 싶다.

의견을 나누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왼쪽)와 장병일 가톨릭신문 편집국장. 사진 서상덕 기자

■ 박준영 변호사는…

1974년 전라남도 완도에서 태어났다.

2002년 제4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 법률구조단으로 활동했다.

국선 변호에 열중하던 2008년 ‘수원 노숙소녀 살인 사건’을 접한다. 국가기관의 도움 없이 형사 재판 재심에서 무죄를 이끌어낸 최초 살인 사건 사례를 만든다. 2015년에는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복역 중인 김신혜의 재심 개시 결정을 이끌어냈다. 이는 수감 중인 무기수의 재심으로는 최초 사례다. 2016년에는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 사건의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재심’이라는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좁은 길을 걸어온 덕에 파산 위기를 맞기도 했다.

힘없고 약한 이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사회에 맞서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재심’ 사건만 전문적으로 맡는 국내 유일의 재심 전문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

정리 서상덕·조지혜 기자 rnsang@catimes.kr·sgk9547@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