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순교자를 만나다] 성 오메트르 베드로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7-02-21 수정일 2017-02-22 발행일 2017-02-26 제 303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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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 겪는 조선에 서품 직후 입국… 29세에 순교

오메트르 베드로 성인 동상과 손골성지 성당. 가톨릭신문 자료 사진

오메트르 베드로 성인은 수원 지역에서, 박해 속에 지친 신자들에게 성체신심과 성모신심을 전하며 사목했던 순교자다.

성인의 성은 본래 오메트르지만, 우리나라에서 사목하면서 오(吳)라는 성을 사용했다. 그래서 오늘날 103위 한국성인호칭기도 중에는 성인을 ‘오 베드로’라 부른다.

성인은 1837년 4월 8일 프랑스 앙굴렘교구의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성실했지만, 성적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성인의 부지런함과 신앙에 대한 열성을 본 본당 주임신부는 성인에게 라틴어를 가르쳤고, 성인 스스로 매일 새벽 먼 곳에 살고 있는 평신도를 찾아가 라틴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런 정성으로 낮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소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비록 낮은 성적으로 입학했지만 성인은 꾸준한 노력으로 학업을 보완해 나갔고, 후에는 우등생이 되기까지 했다. 성인은 1857년 10월 앙굴렘 대신학교에 진학했고, 1859년 8월에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1862년 6월 14일 사제품을 받은 성인은 자신의 전교지인 조선을 향했다. 성인은 조선에 극심한 박해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지체하지 않고 서품을 받은 해 8월에 선교지를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입국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성인은 1년이 지난 1863년 6월, 우리나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성인은 우선 경기도 용인 손골에 머물며 우리말과 문화를 익혔다. 1년 동안 손골에서 말을 익힌 성인은 이후 경기도 지역을 사목했다. 당시 베르뇌 주교가 쓴 편지에서 성인의 사목활동을 엿볼 수 있다. 베르뇌 주교는 편지를 통해 “수련생 같은 이 키작은 신부는 조그만 기적들을 행한다”면서 “그 착한 마음씨에다 온갖 정력까지 다 쏟아서 교우들을 훌륭하게 돌볼 뿐 아니라 신자들에게 성체께 대한 신심과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대단히 잘 가르치고 있다”고 전했다.

1866년 성인이 수원의 샘골(泉谷里)에서 사목하고 있을 무렵, 성인은 베르뇌 주교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성인은 동요하는 신자들을 진정시키고 격려하면서 성물과 미사도구 등을 모두 감췄다. 그리고 다블뤼 주교가 있는 신리마을로 갔다. 성인의 이런 조치는 자신이 잡혀 들어가는 대신 자신이 사목하던 신자들은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성인은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백했다. 결국 1866년 3월 30일 충청도 수영의 갈매못 사형장에서 참수 당했다. 성인이 순교한 그날은 성금요일로 사형 집행 시각이 예수가 운명한 시각과 같았다고 한다. 순교 당시 성인의 나이는 29세였다.

신자들은 성인 순교 후 3일이 지나서야 성인과 다른 선교사들의 시체를 수습할 수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시신은 짐승들이 해친 흔적도, 부패의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고 한다.

■ 성인 발자취 만날 수 있는 곳-손골성지

손골성지(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는 성인이 우리말과 문화를 배우고 선교활동을 하던 곳이다.

※문의 031-263-1242 손골성지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