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하느님을 아세요?”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
입력일 2017-02-21 수정일 2017-02-21 발행일 2017-02-26 제 303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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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수록 닮아가네… 하느님을 아는 진정한 방법
지식이나 정보 차원 떠나 기도로 관계 맺고 일치
‘존재하는 하느님’ 영접

찬미 예수님.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도깨비’라는 드라마를 아시나요? 저는 본 적은 없지만, 주위 분들께서 하도 여러 번 이야기를 하셔서 그 제목이나 출연진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들이 많이 있죠.

그런데, 이 ‘도깨비’라는 드라마에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배우가 누군지 아세요? 여자 주인공은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드라마를 보지 않은 저도 주연 배우들이 누군지 알 정도이니, 드라마를 보신 분들은 당연히 알고 계시겠죠. “남자 주인공은 누구다.” “여자 주인공은 누구다.” 쉽게 말씀하실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 배우들에게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 팬이시라면 그동안 이 배우가 어떤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었는지, 나이는 몇인지, 어떤 광고에 나오는지 등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더 열렬한 팬일수록 더 많이 알고 계시겠죠.

그런데 다시 한번 여쭙습니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이라는 배우를 ‘정말’ 아십니까?

아무리 이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계신 팬이라 하더라도, 이 물음 앞에서는 잠시 머뭇거리시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긴 알지만, 그 ‘앎’이라는 것이 ‘정말로 아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문제가 조금 복잡해지기 때문이죠.

‘누군가를 알고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알다’라는 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이 ‘앎’에는 여러 차원이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차원은 ‘지식/정보의 차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배우의 경력이나 인적 사항 등에 대해서 하나의 지식 또는 정보로 알고 있는 차원입니다. 때로는 더 자세하게 개인적인 취미나 기호, 과거의 행적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기도 하지만, 이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지식이나 정보 차원에 머물러 있는 ‘앎’입니다.

그런데 다른 두 번째 차원은 ‘지식/정보’가 아닌 ‘존재 차원의 앎’입니다. 이 말이 조금 어렵게 느껴지시죠? 쉽게 말씀드리면, 내가 어떤 사람을 알고 있고 그 사람도 나를 알고 있는 관계 안에서의 앎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그 외적인 내용들뿐만 아니라 내적인 모습까지도 알고 있는 ‘인격적인 앎’이죠. 그 사람이 평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왜 그런지, 또 이러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등에 대해서까지도 알고 있는 모습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사람에 대한 ‘존재 차원의 앎’은 점점 깊어질 것입니다. 사실 ‘존재 차원’이라는 낯선 표현을 써서 그렇지 그 내용으로 보면 이미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 안에서 경험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호감이 가는 어떤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가 속한 본당 단체에 새로 들어온 사람일 수도 있고, 직장이나 학교에서 새롭게 만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청년의 경우라면 이제 막 만나서 사귀기 시작한 연인일 수도 있겠죠.

이렇게 우리의 관심과 마음을 끄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어집니다. 요 근래 들어 처음 알게 된 사람인데 어떻게 우리 본당으로 와서 이 단체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전에는 어느 본당에 다녔었는지 궁금하겠죠. 고향은 어딘지,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도 궁금할 겁니다. 연인이라면 그 사람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겠죠. 그런데 이렇게 누군가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가장 좋은 것은 직접 그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만나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때로는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묻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고 그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이젠 됐다.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작 만나보니 처음에 느꼈던 호감이나 관심이 사그라들었다면 그럴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만나면 만날수록 더 끌리게 되고 좋아지는 사람이라면, 계속해서 더 그 사람을 만나고 함께 있고 싶을 겁니다. ‘어제 만났으니까 당분간은 안 봐도 된다’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서처럼 ‘헤어지고 뒤돌아서면 금세 그리워지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간들이 계속된다면 또 어떻게 될까요? 그럼 우리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내가 좋아하던 음식이 아닌데 그 사람이 좋아하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좋아하게 되는 것, 원래 듣던 음악이 아닌데 그 사람을 닮아 좋아하게 되는 것,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그 사람을 닮아가게 되겠죠. 부부가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면 닮아지는 모습이 있다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는 여정의 끝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든 간에, 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치의 모습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지식, 정보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몇 번 만나서 조금 알게 되는 것으로 충분한 것도 아니죠. 참된 의미에서의 ‘앎’은 존재의 차원 그리고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알아감’의 과정인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지 벌써 눈치를 채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네, 맞습니다. 독자분들께 여쭙겠습니다. “하느님을 아세요?”

기도는 어떤 특정 형식을 갖춘 것만이 아닌, 일상 안에서 계속되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의 사소한 이야기를 허물없이 나누면서, 모든 이에게 공통된 하느님이 아닌 ‘나’의 하느님을 체험해 가는 여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여정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되고 닮아가게 되는 것’이죠. 이 여정이 우리 삶 전체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곧 기도인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여태까지의 앎이 생각해 보니 지식, 정보의 차원이었다 해도 괜찮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여정을 떠나기 위한 준비물들을 많이 갖고 계신 것이니까요. 이 준비물들을 잘 챙기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하느님을 ‘알아가기’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민범식 신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rn서울대교구 소속으로 2003년 사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