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조선 왕조·근현대 순교자 214위 시복시성을 향해 (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최용택 기자
입력일 2017-02-21 수정일 2017-02-22 발행일 2017-02-26 제 3033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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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정권 위협에도 교회 수호하며 신앙 증거
대부분 한국전쟁 전후 순교자
20여 명 외국인 선교사도 포함
성덕과 죽음 증거 수집 어렵지만 윤리적 확신으로 순교 확인 가능
신앙 증거하며 이웃 사랑 실천했던 순교 정신 따르기 위해 노력해야

홍용호 주교

패트릭 번 주교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대다수는 6·25 한국 전쟁 중에 순교했다.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최근에 순교한 이들로서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이라고도 부른다. 2월 22일 열린 이들의 첫 예비심사를 계기로, 본지는 근현대 순교자들의 장한 삶과 이들의 시복시성 재판을 위한 지난 과정을 알아보고, 향후 전망을 조망한다.

■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시복 추진은 지난 2009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결정됐다. 당시 주교회의는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와 ‘한국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조사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주교회의는 각 교구로부터 시복 조사 자료를 접수하기 시작했으며, 근현대 신앙의 증인 자료를 신청한 교구 담당자들은 2009년 12월 10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이후 2012년 10월까지 8차례의 선정위원회 회의를 거쳐, 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위원장 유흥식 주교, 이하 시복시성특위)에 상정할 시복 대상자를 선정했다.

이어 2013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는 ‘한국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 추진 안건의 제목을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로 확정했다. 이들은 1901년 제주교난 순교자와 6.25 한국 전쟁 전후 공산당의 박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이며, 20명의 외국인 선교 사제와 3명의 외국인 수녀가 포함됐다. 주교 2명과 사제 48명, 신학생 3명, 수녀 7명, 평신도 21명으로 신분도 다양하게 분포돼 있다.

출신지별로는 평양교구가 24명으로 가장 많고, 서울대교구가 22명, 대전교구 15명, 춘천교구 7명, 광주대교구가 5명으로 그 뒤를 따른다. 수원교구와 인천교구, 제주교구 출신은 각 1명이며, 샬트르성바오로 수녀회 2명, 서울가르멜수녀회 2명, 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 1명이 포함된다.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에는 외국인 신부와 수녀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메리놀외방선교회의 패트릭 번(Patrick Byrne, 한국명 방일은) 주교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사제 7명, 파리외방전교회 사제 12명, 서울가르멜수녀회 2명,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1명이 바로 그들이다.

■ 홍용호 주교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중 대표인물은 홍용호 주교다. 홍용호 주교는 해방 뒤 북한 지역을 점령한 공산정권이 점차 교회의 목을 조여 오는 가운데에서도, 교회 수호를 위해 서슴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던 용감한 목자였다.

홍 주교는 1906년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에서 태어났다. 1920년 서울의 용산 성심학교에 입학했으며, 1933년 사제로 서품됐다. 홍 주교는 일제 말기인 1943년 3월 9일 제6대 평양대목구장으로 임명되고, 3월 21일에 착좌했다. 이듬해 주교로 서품된 홍 주교는 선교에 대한 남다른 열성으로 사제성소와 수도성소 계발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어린이들을 특별히 사랑했으며, 가난한 이웃들과 친교를 나눠, 신자들은 그를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착한 목자’의 표본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해방 후 공산화로 치닫던 북한은 차츰 교회건물을 빼앗고, 성직자·수도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홍 주교는 시시각각으로 조여 드는 공산세력의 위협에, 신자들에게 교구의 안녕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메리놀회 사제들의 본국 송환으로 교구 사목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평양교구 주교좌성당을 완공시키는 등 교회 수호를 위한 투지를 불사르기도 했다.

교회를 박해하던 북한 정권은 1948년 덕원수도원을 폐쇄하고 교회 모든 기관과 성당을 몰수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홍 주교는 이에 대항해 “한국에서 40여 년간 농업·교육·과학·문화 등의 발전에 허다한 공헌을 한 선교사들의 체포는 불법이며, 교회를 폐쇄한 것은 확실한 종교박해로서 북조선정권의 헌법위반”이라면서, “체포된 전원을 무조건 석방하고 교회를 즉시 개방하라”는 내용의 항의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북한 당국은 1949년 5월 14일 눈엣가시 같았던 홍 주교를 납치했다. 당시 홍 주교는 서포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를 찾아 첫 종신서원 예정자를 면담하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한편 교황청은 2013년 교황청 인물연감을 통해 그의 사망을 공식 인정해, 홍 주교의 시복시성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줬다. 그동안 교황청은 홍 주교를 ‘실종’ 상태로 간주했지만, 2013년에는 평양교구장을 공석으로 비워둠으로써 홍 주교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홍 주교의 사망 인정으로 그의 시복 절차를 ‘장애 없이’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시성절차법상 사망이 확인되지 않으면 시복 후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대다수는 6·25 한국 전쟁 중 순교했다.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최근에 순교한 이들로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이라고도 부른다. 사진은 홍용호 주교와 사제단.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평양교구 제공

■ 초대 교황사절 패트릭 번 주교

이번 예비심사 대상자에는 또 한 명의 주교가 포함돼 있다. 바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초대 교황사절로 임명돼, 남한 정부의 합법성을 선포한 패트릭 번 주교다.

1888년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난 번 주교는 1915년 사제품을 받고 메리놀외방선교회에 입회했다. 해외선교를 꿈꿨던 그의 한국행은 1922년 11월 메리놀회가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평안도 지역의 포교권을 위임받으면서 이뤄졌다. 그해 11월 당시 사제였던 번 주교는 한국지부장으로 선출돼, 이듬해 한국에 입국했다.

메리놀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평안도 지역의 교세가 확장되자, 교황청은 1927년 3월 17일 평양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지목구장으로 번 주교를 임명했다. 하지만 이듬해 번 주교는 메리놀회 참사위원으로 뽑혀 지목구장을 사임하고 본국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그렇게 번 주교와 한국과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1947년 비오 12세 교황이 그를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임명하면서 인연은 다시 이어졌다. 번 주교는 그해 10월 9일 입국해, 한국이 합법적인 독립국가임을 인정하는 교황청 문서를 발표했다. 이듬해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국이 합법적인 독립국가로 정식 승인 받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1949년 홍 주교가 불법 납치되는 등 북한 교회 상황이 악화되자, 번 주교는 북한의 종교 박해를 신랄히 비판해 북한 공산 정권으로부터 협박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번 주교는 교황대사관을 지키다가 7월 11일 공산군에 체포됐다. 당시 번 주교는 서울 소공동 삼화빌딩에 감금됐다가 인민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번 주교는 이후 평양감옥, 만포, 고산진, 초산진, 중강진 하창리 수용소를 잇는 ‘죽음의 행진’을 겪으며 극심한 고문과 수난을 당하다 1950년 11월 25일 62세 나이로 수용소에서 순교했다.

■ 현 상황과 앞으로의 예비심사 전망

주교회의가 2013년 춘계 정기총회에서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추진 안건 제목을 결정한 후, 시복시성특위는 그해 3월 13일 81위 하느님의 종들에 대한 역사적 검토를 진행할 역사 및 고문서 전문가위원회를 구성하고 첫 회의를 진행했다. 역사 및 고문서 전문가 회의는 2015년 8월까지 총 9차례의 회의를 통해 이들의 순교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고찰했다.

그 사이 주교회의는 2014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안건 담당으로 대전교구 김정환 신부를 임명했다. 하지만 김 신부가 개인사정으로 사직해, 2016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시복시성특위 총무 류한영 신부가 청원인으로 임명됐다. 시복시성특위는 2015년 7월 3일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장애 없음’ 교령을 받아 예비심사를 준비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예비심사 대상자들 대부분은 6·25 한국전쟁 전후에 순교했다. 이들의 죽음은 대부분 실증적인 확인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전쟁 중에 피랍돼 ‘죽음의 행진’을 걸으며 죽어갔지만, 죽음 자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사례가 많다. 북한의 공산정권이 이들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을 비밀리에 체포하거나 처형하며 이들의 죽음을 감췄기 때문이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이들의 성덕과 죽음의 증거를 수집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 전망이다. 당장 예비심사의 첫 단계로 진행될 현장조사에도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근현대에 이념으로 처형된 사람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교황청 시성성이 ‘장애 없음’ 교령을 보낸 것은 이 안건을 추진할 만한 타당한 근거가 있음을 동의한 것이라고 풀이된다. 교황청은 실증적 순교 사실이 확인되지 않더라도, 윤리적 확신으로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추진한 시복 안건들은 주로 조선 왕조 치하에서 박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 중심이었다. 이번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에 대한 예비심사 시작은 현재와 가까운 시대의 신앙 증인들의 모범을 본받고 그들의 전구를 청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주교회의 시복시성특위 위원장 유흥식 주교는 “한국교회가 순교자와 신앙의 증인들을 시복시성하는 이유는 시복시성자를 늘리려는 차원이 아니다”라면서 “사회의 어둠과 아픔이 있는 곳에서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를 증거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의 순교 정신을 따르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