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정권 위협에도 교회 수호하며 신앙 증거 대부분 한국전쟁 전후 순교자 20여 명 외국인 선교사도 포함 성덕과 죽음 증거 수집 어렵지만 윤리적 확신으로 순교 확인 가능 신앙 증거하며 이웃 사랑 실천했던 순교 정신 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대다수는 6·25 한국 전쟁 중에 순교했다.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최근에 순교한 이들로서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이라고도 부른다. 2월 22일 열린 이들의 첫 예비심사를 계기로, 본지는 근현대 순교자들의 장한 삶과 이들의 시복시성 재판을 위한 지난 과정을 알아보고, 향후 전망을 조망한다.
■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시복 추진은 지난 2009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결정됐다. 당시 주교회의는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와 증거자’와 ‘한국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조사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주교회의는 각 교구로부터 시복 조사 자료를 접수하기 시작했으며, 근현대 신앙의 증인 자료를 신청한 교구 담당자들은 2009년 12월 10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이후 2012년 10월까지 8차례의 선정위원회 회의를 거쳐, 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위원장 유흥식 주교, 이하 시복시성특위)에 상정할 시복 대상자를 선정했다. 이어 2013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는 ‘한국교회의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 추진 안건의 제목을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로 확정했다. 이들은 1901년 제주교난 순교자와 6.25 한국 전쟁 전후 공산당의 박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이며, 20명의 외국인 선교 사제와 3명의 외국인 수녀가 포함됐다. 주교 2명과 사제 48명, 신학생 3명, 수녀 7명, 평신도 21명으로 신분도 다양하게 분포돼 있다. 출신지별로는 평양교구가 24명으로 가장 많고, 서울대교구가 22명, 대전교구 15명, 춘천교구 7명, 광주대교구가 5명으로 그 뒤를 따른다. 수원교구와 인천교구, 제주교구 출신은 각 1명이며, 샬트르성바오로 수녀회 2명, 서울가르멜수녀회 2명, 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 1명이 포함된다.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에는 외국인 신부와 수녀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메리놀외방선교회의 패트릭 번(Patrick Byrne, 한국명 방일은) 주교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 사제 7명, 파리외방전교회 사제 12명, 서울가르멜수녀회 2명,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1명이 바로 그들이다. ■ 홍용호 주교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중 대표인물은 홍용호 주교다. 홍용호 주교는 해방 뒤 북한 지역을 점령한 공산정권이 점차 교회의 목을 조여 오는 가운데에서도, 교회 수호를 위해 서슴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던 용감한 목자였다. 홍 주교는 1906년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에서 태어났다. 1920년 서울의 용산 성심학교에 입학했으며, 1933년 사제로 서품됐다. 홍 주교는 일제 말기인 1943년 3월 9일 제6대 평양대목구장으로 임명되고, 3월 21일에 착좌했다. 이듬해 주교로 서품된 홍 주교는 선교에 대한 남다른 열성으로 사제성소와 수도성소 계발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어린이들을 특별히 사랑했으며, 가난한 이웃들과 친교를 나눠, 신자들은 그를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착한 목자’의 표본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해방 후 공산화로 치닫던 북한은 차츰 교회건물을 빼앗고, 성직자·수도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홍 주교는 시시각각으로 조여 드는 공산세력의 위협에, 신자들에게 교구의 안녕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메리놀회 사제들의 본국 송환으로 교구 사목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평양교구 주교좌성당을 완공시키는 등 교회 수호를 위한 투지를 불사르기도 했다. 교회를 박해하던 북한 정권은 1948년 덕원수도원을 폐쇄하고 교회 모든 기관과 성당을 몰수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홍 주교는 이에 대항해 “한국에서 40여 년간 농업·교육·과학·문화 등의 발전에 허다한 공헌을 한 선교사들의 체포는 불법이며, 교회를 폐쇄한 것은 확실한 종교박해로서 북조선정권의 헌법위반”이라면서, “체포된 전원을 무조건 석방하고 교회를 즉시 개방하라”는 내용의 항의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북한 당국은 1949년 5월 14일 눈엣가시 같았던 홍 주교를 납치했다. 당시 홍 주교는 서포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를 찾아 첫 종신서원 예정자를 면담하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한편 교황청은 2013년 교황청 인물연감을 통해 그의 사망을 공식 인정해, 홍 주교의 시복시성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줬다. 그동안 교황청은 홍 주교를 ‘실종’ 상태로 간주했지만, 2013년에는 평양교구장을 공석으로 비워둠으로써 홍 주교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홍 주교의 사망 인정으로 그의 시복 절차를 ‘장애 없이’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시성절차법상 사망이 확인되지 않으면 시복 후보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