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헬기조종사의 병영일기] 변방으로 떠나라

이연세(요셉) 대령 (육군 항공작전사령부)
입력일 2017-01-03 수정일 2017-01-04 발행일 2017-01-08 제 3027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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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강원도 인제군 현리! 1997년 12월의 찬바람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얼어붙게 했습니다.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봐도 산밖에 보이지 않는 오지. 손바닥만 한 하늘에는 수많은 까마귀들이 날아다니며 “까악 까악” 울어대는 바람에 마음을 더욱 스산하게 했습니다.

‘기약도 없이 여기서 살아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왜 내가 와야 하는가? 남들은 한 번도 안 오는데 두 번씩 강원도 근무를 시키는 이유가 뭔가? 이곳만은 안 된다고 그토록 말했건만 결국 이곳으로 보내다니!’ 저는 변방의 첩첩산골로 유배를 온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곳 산골에서의 생활은 단순 그 자체였습니다. 눈 뜨면 출근하고,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면 삼삼오오 모여 술 한 잔 걸치는 것이 낙(樂)이었습니다. 30대 중반의 혈기왕성한 제가 텅 빈 숙소로 돌아와, 서울에 남겨두고 온 어린 아들과 아내를 생각할 때는 외롭고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간부들은 변방에서의 외로움과 고통을 잊기 위해 술에 의지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유희에 빠져 시간과 돈을 낭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급장교 2명이 부적절한 여자관계에 연루돼 옷을 벗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듣게 됐습니다.

저는 ‘나라고 저런 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저의 생활을 다시 한 번 돌아보며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로운 마음으로 ‘생활수칙 5계명’을 만들었습니다. 첫째, 6시에 일어나고 11시에 잠자리에 든다. 둘째, 건강을 위해 세 끼 밥은 꼭 챙겨 먹는다. 셋째, 하루에 책 100쪽 이상을 읽는다. 넷째, 술자리를 하면 9시 이전에 끝내고 복귀한다. 다섯째, 매일 일기를 쓴다. 이때는 제가 비신자였습니다.

이때부터 변방에서의 저의 삶은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제일 먼저 서점으로 달려가 몇 권의 책부터 집어 들었습니다. 책을 읽고 목록을 작성하고, 좋은 구절을 정리하고, 나름의 코멘트를 붙이는 재미를 들였습니다. 저의 하루하루는 내면의 성장과 기쁨으로 변해갔습니다.

이렇듯 저의 변방생활 5년은 한 방울 한 방울 내면의 물동이를 채우는 귀중한 축척의 시간이 됐습니다. 변방으로 간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변방으로 가는 것은 위기인 동시에 또 다른 기회가 숨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변방은 활용하기에 따라서 자신의 내면을 닦고 진정한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철저하게 변방에 사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태어나신 곳 자체가 변방의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공생활을 보면 중심으로부터 완전히 배척당했고, 가장 낮은 곳에서 외롭게 고통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국 세상의 빛이요, 왕이 되셨습니다.

변방에 있다고 영원히 변방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변방이 곧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연세(요셉) 대령 (육군 항공작전사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