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8)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4)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
입력일 2016-12-13 수정일 2017-08-29 발행일 2016-12-18 제 3024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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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삶의 스승’으로 학생들 이끌어

1976년 2월 바오로 6세 교황을 알현하고 있는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오른쪽). 출처 클라우스 헴멀레 홈페이지(www.klaus-hemmerle.de)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아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래로 이 진리에 예외란 없습니다.

인간이 되어가는 길은 아이가 되는 길을 거쳐가는 것이지요.

이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이가 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분이 가장 사랑하는 친구인 아이들을 받아들일 때, 그분께 속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이들처럼 그 분 자신을 받아들일 때, 그분께 속합니다.

오직 아이가 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는 단순하게 되는 것, 맑고 가뿐해지는 것, 고통과 연민을 느낄 수 있는 것, 기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거듭거듭 선사되는 존재로서 놓아 둘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아이는, 체념과 잇속을 챙기는 마음에 대해서, 이기주의와 공허함에 대해서 치유하는 힘입니다.

구유 안에 계신 아이는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분과 함께 사람이 되도록,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하느님의 생명을 받도록.

– 1979년 헴멀레 주교가 지인들에게 보낸 성탄인사

하느님께서 성탄에 오시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시간을 쓰는 방식은 ‘합리적’이지 않았습니다.

지상에서 보내신 예수님의 시간의 대부분은 말하자면 성탄절에 깃든 약함과 가난함의 연장이었으니까요.

어떤 쓸모나 효과를 초월한 ‘여기 있음’ 자체.

그러나 바로 이것이 계시입니다.

하느님이 그저 우리가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에 계신다는 것.

우리는 그러니 이제 구유 앞에 머물러 그분을 바라보면 됩니다.

아무것도 말할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여기에 있으면 됩니다.

이러한 침묵이, 우리에게 다가온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준을 뒤엎고 전복시키는 것이지요.

그분은 그저 이렇게 와 계십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님이 하실 수 있었던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무력하되 빛나며 존재하시는 그 자리에, 하느님 자신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이제 여기에 우리를 위해 계십니다.

베들레헴의 아이의 모습으로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아기는 나에게 말합니다.

아기는 당신에게 말합니다.

아기는 모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여기 있으니, 참 좋습니다, 라고.

- 헴멀레 주교의 성탄 묵상집 「뒷문을 통해 구유로」 중에서

“사랑하는 어린이 여러분, 왕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답니다. 그분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옷을 입으신 분이지요. 그분처럼 가난하고 보잘 것 없고 약한 이들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우리는 그 왕을 만나는 거랍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들이 나의 형제들 중에서 가장 작은 이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지.” 자, 이제 이 이야기를 이해하겠나요? 우리 모두는 마땅히 예수님과 함께 왕들이 되어야 해요. 우리는 그 분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찾고, 발견하고 사랑해야 한답니다. 그리고 그 분은 가장 위급하고 비참한 곳에 계신답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성탄절에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예수님을 찾는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잘 알고 있겠네요. 맞아요, 그분은 가장 헐벗고 누추한 옷을 입고 계셔요. 그런 옷이 있는 곳에 예수님도 계실 거예요.

– 1979년 헴멀레 주교가 교구의 어린이들에게 성탄절에 보낸 사목서한

■ 교수이자 학자로서의 헴멀레

본당 공동체에서 보좌신부로서 가진 사목 경험, 여러 가톨릭 단체와 기구에서의 활동, 사회와 대화하고 교류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 체험들과 함께 헴멀레 주교의 사상과 영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종교철학과 기초신학 분야의 연구가이자 학자로서 대학에서 보낸 시간과 여러 스승과 제자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가톨릭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근대와 현대의 철학에 개방적인 학풍을 가진 독일의 유서깊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특히 베른하르트 벨테의 영향 하에서 수학한 후 신학교가 있는 본에서 강사로 첫 강의를 시작하며 교수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어 그는 보훔의 기초신학 교수로 임명받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걸출한 가톨릭 신학자 리하르트 셰플러와 풍요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는 보훔의 교수직에 만족했었지만, 벨테가 오랫동안 맡아왔던 가톨릭 종교철학의 교수좌를 맡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사명이자 책임으로 느껴졌기에 자신의 고향이자 소속교구이기도 한 프라이부르크의 신학부로 귀환하게 됩니다.

그는 스승 벨테가 전개한 가톨릭 철학의 관점에서의 종교 현상학과 해석학을 이어받으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발전시켜 나가고, 특히 구체적인 삶과의 연관성에 관심을 가집니다. 학문적으로는 프라이부르크 출신의 현상학과 해석학의 대가이자 ‘구조 존재론’을 제시한 하인리히 롬바흐의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철학은 헴멀레가 종교현상학에 관해 ‘교회’가 가지는 의미를 깊이 숙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앙인의 실제적 체험에 깊이 뿌리내린 헴멀레의 고유한 종교철학은 자주 ‘신앙의 현상학’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그는 종교철학과 기초신학을 포괄하여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자신의 학문이 지적 자기만족이 아니라 신앙인의 실천적 삶에 부합하고 도움을 주는 교회의 학문이 되도록 노력합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는 학생들과 격의없고 가까운 관계를 맺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소박하고 검소하면서도 유쾌한 그의 태도는 많은 학생들이 ‘학문의 스승’만이 아니라 ‘삶의 스승’을 그 안에서 만나게 했습니다.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