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47)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 (3)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
입력일 2016-12-06 수정일 2017-08-29 발행일 2016-12-11 제 3023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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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실천 위한 시노드 실무 맡아

1971년 뷔르츠부르크 시노드에서 업무 중인 클라우스 헴멀레 주교(왼쪽).(출처 www.klaus-hemmerle.de)

여기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분이 있다. 바로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셨기에, 그분이 인간이 되셨을 때, 그분이 취하려 하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분은 오직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은, 그분 자신은 멀리 떨어져 계신 채, 우리에게 친절하게 선물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분의 관심은 그분 스스로가 우리의 상황 안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시며, 우리의 삶이라는 열차 안에 탑승하신다.

– 클라우스 헴멀레, 「우리를 위한 말씀」 중에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 하나의 창문이니. 대성당의 찬란하고 장엄한 색유리창.

그러나 빛이 없다면 이런 창문들이 무슨 소용이랴.

성탄절에 빛이 솟아오르네. 성탄절에 나의 삶을 비추시는 그분이 태어나시네.

비록 내가 아직 나의 삶에서 오직 어둠만을 보고 있을지라도.

나는 이제 그분의 빛 속에서 나의 삶을 두 손에 가만히 품고 싶다네.

그리고 그 창문은 곧 빛나는 색채로 환해지겠지.

그리고 많은 이들이 빛을 보게 될 것임을.

– 클라우스 헴멀레, 「하느님의 시간, 사람의 시간」 중에서

■ 헴멀레의 신학과 영성의 원천

헴멀레는 사제로서 자신에게 주어지고 허락되는 소명들 안에서 삶과 신학, 철학, 영성을 실존적으로 깊이 자신 안에 통합하고 표현하고 나누려 평생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클라우스 헴멀레의 삶의 여정은 젊은 사제이자 보좌신부로서 최초로 사목적 체험을 했던 세 가지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1950년대 중반 프라이부르크 교구의 가톨릭 아카데미의 설립과 기획, 운영의 실무 책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1960년대 후반기부터 독일 주교회의에 의해 가톨릭협의회(ZdK)의 영적 동반자 역할을 오랫동안 맡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기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독일교회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매우 의미 있는 시도였던 뷔르츠부르크 시노드(1971~1975)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실무에 참여하는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범 교구적인 다양한 활동들은 그가 교회와 세상과의 대화와 협력에 대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내의 사제들과 평신도들 사이에서의 동등하고 자유로운 대화와 이해 증진에 많은 경험과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활동들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신학과 영성을 정립하는 데 있어, 추상적, 관념적 차원에만 몰입하지 않고, 실질적인 경험에 뿌리내리고, 여러 다른 견해와 관점들에 개방돼 있는 대화적 성격을 잃지 않는 자세를 지켜갈 수 있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신학적, 철학적 사유와 일상적 삶, 사목적 활동 등을 잘 통합한 영성을 열매 맺고, 쉽고 매력적이며 인간적인 언어로 그러한 영성을 표현한 시기는 역시 아헨교구 교구장으로서 활동한 마지막 시기일 것이지만, 그 중요한 밑거름이 된 것은 신학자이자 종교 철학자로서 교수 생활을 했던 시기일 것입니다.

그는 학문적 활동의 시작부터 삶에 뿌리내린 신학과 철학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이자 평전을 쓴 빌프리드 하게만이 전해주는 다음과 같은 헴멀레의 인상적인 고백은 그의 신학의 동기와 원천을 잘 보여줍니다.

“나의 신학과 사상에 있어 중요한 하나의 원천은 내가 정신과 영혼 깊숙한 곳에서 씨름하였고 전율하게 만드는 거대한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매우 종교적이고 신앙심이 가득했지만, 또한 대단히 자유롭고 개방적인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나는 청소년기에 ‘이런 책은 읽으면 안 돼!’라는 내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한 책을 탐독했습니다. 그것은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신존재 증명’을 비판하는 책이었죠. 나에게 이것은 청천벽력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칸트의 비판에 제대로 반박의 대답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보게 되었던 거죠. 그때 저는 매우 혼란스러웠고, 내적으로 매우 분열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시 나의 신앙이 참되다는 직감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나보다 훨씬 지적으로 뛰어나고 존경할 만한 인물이 있고, 그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으니까요. 자, 이제 나보다 더 학식 있고, 지혜롭고, 더 교양 있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하면 그를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이 되었던 거지요.

이러한 내적 갈등과 고민은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고, 사실 사제품을 받고 첫 두 해 동안은 특별히 심했습니다. 이는 저로 하여금 끊임없이 새로운 사유의 길을 추구하고, 이해하고, 논증을 연구하고, 파악하려 노력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저의 신학의 또 다른 원천이 저를 구했습니다. 부모님은 그 시대 신앙에 대한 저술들과 강연들로 유명한 작가 라인홀트 슈나이더와 깊은 친분이 있었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라인홀트 슈나이더가 예술가라는 사실은 제 안에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있어, 철학적 논증을 넘어서고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아버지와 슈나이더 같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저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논증만으로는 결코 파괴할 수 없는 진실되고 참된(신앙적이고 종교적인) 경험이 무엇인지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정신적 위기에서 저를 구했습니다. 분명해진 것은, 신학은 이러한 가장 깊고 진실되고 실존적이며 참된 경험과 씨름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신학은 단지 이론적 사항에 대해 고투하는 작업이 아니라, 논증과 이론으로는 없앨 수 없을 정도로 절실한 경험들에 뿌리내린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