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이야기] (42) J.R.R. 톨킨 (4)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
입력일 2016-11-01 수정일 2016-11-02 발행일 2016-11-06 제 3018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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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위해서… 끊임없이 맞서 싸운 작은 영웅들

■ 진정한 영웅 : 선을 추구하며 삶에 뿌리내린 작은 이들

‘반지의 제왕’은 절대반지로 상징되는 악의 세력과의 투쟁이 이야기 중심입니다. 톨킨은 이러한 투쟁이 결코 가벼운 것도, 상상의 것도 아닌 각 개인의 인생과 인류 공동체의 역사를 관통하며,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절박하며 엄중한 실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때때로 잔혹하게 느껴질 정도로 처절하고 실감 나게 전쟁을 묘사하였습니다.

‘반지의 제왕’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우리말 역자들은 초판에서는 이러한 의미에서 ‘반지전쟁’이라는 의역을 제목으로 선택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비록 개역판에서는 다시 원제의 직역인 ‘반지의 제왕’이 제목이 되었지만, 작품의 중심 주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기억할 만한 언급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지의 제왕’을 ‘반지전쟁’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때, 중요한 점은 ‘반지의 제왕’ 중심 주제인 ‘투쟁’이 결코 권력의 획득이나 주인공의 주관적 관점에서의 선악 대결이 아니라는 것을 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타나는 수많은 암투와 투쟁과 전쟁들은 명백히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의미를 지닌 ‘살아있는 상징’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는 오늘날 우리가 게임과 만화, 소설, 영상의 영역에서 너무나 자주 만나는 판타지들(예를 들면 ‘왕좌의 게임’)과 ‘반지의 제왕’이 구분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등장하는 투쟁은 적대적 정치세력과의 군사적 대결만이 아니라 동지들 사이에 생겨날 수 있는 질투와 반목, 자기 자신 안의 야심과 자기기만과 대결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중단 없는 ‘영적 투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영적 투쟁’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분리되거나 초연한 자세를 지닌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도전들에 제대로 대면하고 결단하며 행동하게 만드는 원천이 됩니다. 우리가 ‘반지의 제왕’에서 발견하게 되는 영적인 투쟁은 궁극적으로 ‘선의 추구’라는 인생의 근본자세와 연결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서 역설적이게도 ‘반지의 제왕’은 영웅이 아니며 반지로 상징되는 절대 권력에 대한 욕망에 빠져 스스로를 파괴하며 자기도취와 허위의 세계에 빠져있는 자입니다. 이는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 반지에 접근한 이들에게는 잠재적으로 주어져 있는 유혹입니다. 이러한 유혹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세상을 위한 선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이 장대한 이야기의 중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반지의 전쟁’에는 간달프나 아라곤느와 같은 수없이 많은 영웅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등장하는 참된 영웅들은 모두 내면에 깊은 겸허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지를 파괴시키는 가장 중요한 일을 가장 작고 약하며 두드러지지 않는 존재인 호빗이 수행하고 있다는 것에서 톨킨의 속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작고 평범하되, 희망과 용기를 지니며 사는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이들이며 선을 추구하는 주역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요정 왕 엘론드가 ‘반지 원정대’를 출정시키고자 한 회의에서 호빗들을 원정대에 포함시키며 들려준 이야기에서 감동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매우 어려운 길이지요. 하지만 강한 이나 지혜로운 이는 멀리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 길은 강한 자 만큼의 희망을 가진 약한 이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인 것은 사실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강자들의 눈이 다른 곳에 닿고 있는 동안 작은 손들은 바로 자신들이 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하는 겁니다.”

■ 샘 : 일상적 삶을 사는 것도 영웅적 삶 보여주는 인물이라

톨킨은 이처럼 작고 약해 보이지만 희망을 지니고 있기에 악과 투쟁하고 선을 추구하는 이들을 진정한 영웅으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의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이 우정과 사랑을 아는 이들이며, 일상에 뿌리내리고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톨킨의 생각이 가장 잘 구현돼 있는 인물이 절대반지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 호빗이 프로도의 절친한 친구이자 시종이며 동지인 호빗 샘입니다. 그는 작품의 절정이라 할 ‘반지의 제왕’ 3부 ‘왕의 귀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샘은 다시 절대반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공포와 위협만이 느껴질 뿐 아무런 위안이 없었다. 멀리서 폭발하고 있는 불의 산을 본 순간 반지의 무게에 변화가 생겼다. 머나먼 옛날 그 반지를 벼려 만들었던 바로 그 화산 분화구에 가까워질수록 반지의 무게는 더 무거워져 급기야 어떤 강력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이 되었다. 그렇게 서 있는 동안, 반지는 줄에 매여 목에 걸려 있었는데도 샘은 자기 존재가 훨씬 커진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일그러지고 거대해진 그림자를 몸에 걸치고 있는 듯했으며, 그 그림자가 모르도르의 산맥 위로 광대하고 불길하게 드리워지며 위협을 가하는 느낌이었다. 샘은 이제 양자택일을 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반지가 그를 괴롭히더라도 절대반지를 끼지 않든지, 아니면 반지를 자기 것이라 주장하고 암흑의 골짜기 저편 지하 요새에 버티고 있는 악마에게 도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반지는 그의 의지와 이성을 갉아먹으며 샘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무수한 환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위대한 영웅 샘와이즈가 불칼을 들고 암흑의 땅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뒤에는 무수한 군사들이 따르고 있었으며 바랏두르는 전복되고 말았다. 다음 순간 구름이 걷히고 밝은 태양이 빛났다. 그의 명령에 따라 고르고로스 계곡은 꽃과 수목의 동산이 되어 열매를 맺었다. 이제 그는 절대반지를 끼고 자기 것으로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시험의 순간에 샘이 의연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프로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소박한 호빗다운 분별력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설사 그러한 환상이 자신을 기만하는 속임수가 아니라 할지라도, 샘은 자신이 그러한 짐을 감당할 만한 큰 인물이 아님을 마음 깊이 알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명령하여 가꾸는 왕국만큼 큰 정원이 아닌, 자기 손으로 가꿀 수 있는 작은 뜰의 자유로운 정원사, 그것이 그가 바라는 바였고 또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샘은 위기에 빠진 프로도를 구하고 반지를 파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는 엄청난 위험을 무릅쓸 용기를 가졌을뿐더러, 누구도 이겨내지 못한 절대반지가 주는 권력의 유혹도 이겨냅니다. 톨킨은 샘이 이러한 위대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프로도에 대한 진정한 우정을 지녔기 때문이며, 또한 자신의 일상의 삶을 사랑하는 소박하되 자유로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상과 가족과 친구에 대한 순수하며 소박한 사랑이야말로 선을 추구하는 삶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톨킨의 평소 삶의 반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톨킨의 가족과 친우들과의 관계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안식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