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교구 이곳저곳] (15) 남한산성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6-10-25 수정일 2016-10-26 발행일 2016-10-30 제 3017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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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인정한 명소에서 순교자들의 신앙을 만나다
‘영혼들의 안식처’ 남한산성 순교성지
신해박해부터 수많은 신자 순교했지만
그 중 30여 명만 기록 남아 안타까워

단풍으로 물든 남한산성 행궁.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 찾은 많은 관람객과 신자들이 북적이고 있다.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요즘, 많은 이들이 단풍으로 물든 풍경을 찾아 떠난다. 경기도 지역 단풍 명소 중에서도 이름난 곳이 바로 남한산성이다. 이곳은 또 우리 신앙선조들이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킨 순교지이기도 하다.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남한산성을 찾아, 순교자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신앙의 의미를 기억해보면 어떨까.

남한산 자락을 따라 올라가니 수많은 등산객들이 보인다. 해발 300~500m에 이르는 고지대에 위치한 성이기에 옛날에는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었으리라 추측하기 쉽지만, 조선시대에도 남한산성을 오르는 길은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길이었다. 남한산성이 광주 유수부의 행정기관인 치소(治所)가 있는 곳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오늘날로 치면 ‘도청소재지’다.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역사의 명소이자 단풍의 명소이기에 먼 곳에서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먼 곳에서 찾아와 이 길을 걸은 또 다른 이들을 기억해본다. 박해시대 광주 지역에 살던 수많은 신자들이다.

광주(廣州)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치소는 상당히 넓은 지역을 관할했다. 당시 광주는 현재의 광주시뿐 아니라 현재 서울시 강남·송파·강동·서초구의 대부분의 지역과 성남, 하남, 의왕 등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포함됐다.

한국교회를 받아들인 신앙선조들이 살던 곳이자 구산, 단내, 하우현, 먹방리 등 많은 교우촌이 형성된 지역이기도 했다. 광주 곳곳에서 잡혀와 이곳에서 죽은 수가 자그마치 300명에 달한다. 신해박해(1791년) 때 순교한 한덕운(토마스) 복자를 시작으로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걸쳐 많은 이들이 순교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중 30여 명의 행적만이 기록에 남아있다.

인파를 지나 남한산성 순교성지에 들어섰다. 시끌벅적하던 남한산성 내 다른 곳과는 달리 고요함이 감돈다. 우리 전통 목조건물로 지어진 성당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순례자들도 침묵을 지키며 기도했다. 성지 밖의 혼잡했던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안정감이 든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이곳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죽은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영혼이 위로받을 수 있는 성지라는 의미에서 2005년 ‘영혼들의 안식처’로 선포됐다. 성지의 분위기와 참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하지만 성지가 ‘영혼들의 안식처’로 선포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성지가 현양하는 복자 한덕운 토마스의 삶과 정신을 따르기 위함이다.

복자는 박해시기 사기그릇 행상인으로 변장해 서울을 오가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염했으며, 그 가족들의 신앙을 돌보기도 했다. 자신 역시 천주교인으로 발각돼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복자는 두려움 없이 순교자들의 시신 돌보는 일을 계속해나갔다.

성지가 조성된 곳은 사실 순교지는 아니다. 오히려 남한산성 도처가 다 순교지다. 현재 로터리주차장이 된 포도청과 감옥, 제승헌과 연무관, 동문 밖 형장에 이르기까지 순교자의 피가 흩뿌려진 순교 터다.

바람이 불자 나무를 울긋불긋 물들인 단풍들이 떨어져 땅을 단풍의 색으로 물들였다. 그 속에 십자가의 길을 바치는 신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교자의 피가 뿌려진 이 땅에서 순교자들의 신앙이 우리에 신앙에 물드는 것만 같다.

남한산성 순교성지 십자가의 길에서 기도하는 순례자들.

성지 입구에 있는 순교자 현양비.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