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우리교구 이곳저곳] (14) 죽산성지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16-09-20 수정일 2016-09-21 발행일 2016-09-25 제 3012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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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때 수많은 피 뿌려진 곳… 순교성지로 거듭
잊은 터·두둘기 등 지명에서 처형 당시 참상 엿볼 수 있어
여기중 등 순교자 묘지 조성 

죽산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의 묘.

올해는 한국교회 4대 박해 중 가장 가혹했다고 하는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150년이 되는 해다. 병인박해의 순교지 죽산성지를 찾았다.

일죽IC에서 안성방면으로 400m 가량 가니 왼쪽에 ‘죽산성지’임을 알리는 커다란 표지석이 나타났다. 이어 표지석이 있는 골목으로 1㎞ 가량 들어가니 웅장한 교구 영성관과 아름답게 조성된 성지가 나타났다.

넓게 퍼진 잔디와 나무와 꽃이 조화롭게 자리하고 있어 어느 계절에 찾아도 아름다워 늘 기억하고 싶은 성지이건만, 옛 사람들은 이곳을 “잊어라”는 의미를 담아 ‘잊은 터’라고 부르곤 했다.

본래 이 자리는 고려 때 몽골인들이 진을 친 곳이라고 해서 ‘이진(夷陣)터’라 불렸다. 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처형당하고 돌아오지 못한 참상에 ‘이진터’는 ‘잊은 터’라는 이름으로 변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곳에 끌려가면 이미 죽은 사람이니 잊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죽산 지역의 병인박해가 얼마나 참혹했으면 이렇게 지명에도 그 상흔이 남아있을까. 하지만 죽산의 지명에 남아있는 박해의 흔적은 이뿐이 아니다. 삼죽면의 ‘두둘기’ 역시 박해의 아픔을 담고 있는 지명이다.

죽산은 조선시대에 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지금의 안성시 죽산면, 일죽면, 삼죽면과 용인시 원삼면, 백암면을 아우르는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죽산 지역에는 병인박해 전후로 고초골, 남풍리(속칭 남굉이), 용촌, 양대리 등 여러 교우촌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잡혀온 신자들이 죽산관아, 즉 지금의 죽산면사무소 자리로 끌려왔다.

지역이 넓은 만큼 관아로 가는 길도 녹록치 않았다. 포졸들은 신자들을 호송하던 중 삼죽과 죽산의 분수령인 고개를 지나곤 했다고 한다. 이때 신자들은 가족과의 마지막 순간을 안타까워하면서 땅을 치고 두들기며 통곡했다고도 하고, 포졸들이 끌려가지 않으려 하는 신자들을 두들겨 때려 끌고 갔다고도 전해진다. 이런 모습에 ‘두둘기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죽산성지의 십자가상.

두둘기길 표지판.

지역 개발로 ‘두둘기고개’의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지금도 삼죽면에는 ‘두둘기길’, ‘두둘기삼거리’ 등과 같은 지명이 남아있다. 죽산성지로 들어오는 길에 세워진 큰 표지석이 이 ‘두둘기’에서 옮겨온 바위다.

성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성역을 순례했다. 성역에는 성지에서 순교한 순교자의 묘가 조성돼 있었다. 지난 2014년 시복된 복자 박 프란치스코와 복녀 오 마르가리타의 묘를 비롯해 2차 시복시성 대상자 명단에 오른 하느님의 종 여기중, 문(막달레나), 정덕구(야고보), 조치명(타대오), 김(우르시치나), 최제근(안드레아) 등의 묘도 이곳에 있다.

그런데 유난히 가족 순교자가 많다. 조선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한 가족을 처형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하는 나라였다. 유교가 가르치는 인륜을 저버리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병인박해 당시 죽산의 형장에서는 부부 혹은 부모와 자식 등을 함께 처형하는 일이 자행됐다.

1867년에는 여정문과 그 부인, 그 아들 일가가 함께 처형됐고, 1868년에는 복자 박 프란치스코·복녀 오 마르가리타 부부, 조치경·김 우보로시나 부부, 최성첨과 그의 장남이 같은 날 처형되는 등 수차례에 걸쳐 한날한시에 신자 가족들이 순교했다.

미사가 봉헌되는 시간대가 아니었지만, 성지에는 가족끼리, 지인끼리 모여 순례하는 이들이 자주 보였다. 고속도로와 닿아 있어 교통이 편리한 만큼, 여럿이 함께 차를 타고 순례하기 좋아 그런 듯했다.

성지를 순례하는 신자들을 보면서 문득 이곳이 순교성지가 된 이유 역시 비슷한 것임을 기억해 냈다. 서울을 향한 큰길가에서 처형을 실시해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심어주고자 처형지로 삼은 곳이었다.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지 150년이 흐른 지금, 죽산은 이곳을 찾는 많은 신자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성지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