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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 복음살이] ‘쓰고 버리는 문화’를 버리다

박영호 기자
입력일 2016-06-28 수정일 2016-06-29 발행일 2016-07-03 제 300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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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부추기는 사회에 저항하며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기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고 보는 소비사회. 프란치스코 교황은 탐욕스러운 소비주의를 비판하며, 쓰고 버리는 문화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구매는 단순히 경제적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도덕적 행위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버릴 거 있으면 다 갖고 와. 시골에 버리면 어디에든 쓸 수 있으니까.”

막 50대에 접어든 김기범(안드레아·51)씨. 10여 년 전에 귀농해 충북 괴산의 심심산골에서 살고 있는 그는 가끔 친구와 친지들에게 전화로 그렇게 말하곤 한다.

게을러서 매일 챙겨 먹지 못한 유통기한 지난 비타민, 코팅이 들떠서 달걀 프라이만 해도 지저분해지는 프라이팬, 약간 녹슨 수저들, 길고 짧은 노끈들이나 심지어 몇 달씩 지난 잡지책들도 시골에서는 아주 유용하게 사용한단다. 버리는 게 없다. 딱히 재활용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냥 평생 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을 빌면, ‘쓰고 버리는 문화’가 그곳에서는 없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버리는 문화’가 인기라고 한다. 이른바 ‘미니멀리즘’. 최소한의 것들만을 가지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아니 최소한으로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더 유리하다는 깨달음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버리고 나서 다시 소유하지 않으니, 적게 소유하는 것을 지향하니, 사실은 ‘버리는 문화’라기보다는 ‘적게 소유하고 단순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게 소유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소유와 관련된 서적들의 판매고이다. ‘인터파크 도서’가 집계한 자료에 의하면, 올해 3월까지 관련 도서의 판매량은 지난해보다 무려 13배나 증가했다. 일본의 미니멀리스트 10명의 이야기를 담은 「아무것도 없는 방에 살고 싶다」(샘터사)가 대표적이다.

인터넷, 특히 SNS에서도 이 같은 트렌드는 폭발적이다.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은 카페를 만들어 단순한 삶의 노하우를 공유 한다. 네이버 카페 ‘미니멀라이프’는 회원 수만 무려 2만 명이 넘는다. 가방을 버리고 구두도 버린다.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지 않을 간결한 식단의 노하우는 공유한다. “어머 언니 옷이 그거밖에 없어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뿌듯해하고, 집에 쓰레기통이 없다는 인증샷도 올라온다.

최유수(체칠리아·38)씨는 초등학생 딸 하나를 둔 주부이다. 넓은 집, 예쁘고 풍성한 살림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뜻한 바(?) 있어 집과 세간을 줄이기 시작한지 5년째다. 모든 것이 가벼워졌다. 냄비 두어 개와 프라이팬 2개, 그릇 몇 개와 컵. 아주 약간의 불편을 감수할 인내와 전보다는 조금 더 많은 부지런만으로도 삶의 질은 유지됐다. 남는 음식은 생각도 못한다.

“작은 집에 빈약한 세간이지만 있을 건 다 있습니다. 문제는 내 삶의 질을 어디에 맞추는가 하는 거지요. 남과 비교하거나 남의 눈을 의식하면 그리 못살지요.”

처음에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에 대한 개인적 동경이었지만, 실천을 거듭하다보니 생태와 환경의 거시적인 명분으로 확장됐다. 개인적으로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고, 사회적으로는 환경에 대한 깊은 관심, 이웃과 지구 공동체에 대한 유대감이 생겼다.

적게 소유하고 적게 소비하는 소박한 삶. 쓰고 버리기, 또 쓰고 버리기를 강권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가난하고 빈곤해 보이는 삶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궁금하다.

애당초 이러한 유행의 시작은 미국과 일본이라고 한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예술과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형성했다. 2차 대전 이후 문명의 야만성을 경험한 이들은 인공과 인위를 거부하고 자연과 무소유의 삶에 이끌렸으니 사실 오래 된 일이다.

2010년 미국에서 두 명의 평범한 회사원이 소유욕을 끊고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만 소유하고 나머지 몸과 마음, 에너지를 좀 더 의미 있는 것에 투자하기로 했다. 웹사이트 미니멀리스트 (www.theminimalists.com)와 함께 펴낸 책 「두 남자의 미니멀 라이프」(책읽는 수요일 출판)는 폭발적 관심의 대상이었다.

일본에서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대지진. 사람들은 당시 쓰나미로 인해 자신들이 그리도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들이 허망하게 사라지고, 심지어 물결에 밀리면서 오히려 자신들을 공격하는 흉기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소유가 무의미할 수 있음을 실감했다.

한국에서는 주부들을 중심으로 소유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확산됐다. 급속한 경제 성장과 그 와중에 구축된 고도의 경쟁 사회, 물질과 소유 및 과시가 팽배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자기계발과 힐링, 멘토링 등은 화려함을 추구하느라, 피곤한 삶의 대안이 더 이상 되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저성장과 경제 침체가 소박한 삶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환경과 생태 문제에 대한 높아진 의식도 큰 몫을 차지한다.

이러한 흐름의 가장 큰 맥락은 ‘반 소비주의’라 할 만하고 이는 곧 ‘소비적 자본주의’에 대한 강경한 저항이 아닐 수 없다. 서구사회에서는 사상적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이기도 한 이 움직임들이 낯설지 않다.

프랑스의 비드 그르니에(Vide Grenier)는 ‘다락방 비우기’라는 뜻의 벼룩시장을 말한다. 말 그대로 집안에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들을 내놓고 헐값에 처분하는 것이다.

10여 년 전부터 프랑스에서는 비드 그르니에의 수와 방문자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언론들은 이를 ‘낭비에 저항하는 투쟁의 장’이라고 부른다. 직접적으로는 경제 위기의 탓이 크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부도덕하고 천박한 자본의 놀음에 더 이상 놀아나지 않겠다는 자성의 표현이라는 분석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프랑스의 소비 패턴을 파악하는 키워드는 유기농, 공정무역과 함께 ‘중고’이다.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일부러 낡은 것이 되게 만들어 버리는 현대 기업과 경제 체제의 부도덕성을 비판하는 용어이다.

주시원(아델라·39)씨는 버벅거리는 휴대폰을 머리 위로 흔들면서 “정말 정확해요”라면서 “약정이 끝나기 두어 달 전이면 정확하게 폰이 문제가 생긴다”고 투덜거린다.

새 모델에 대한 집착이 없는 소비자들 역시 2년이 지나기 전에 휴대폰을 갈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는 의혹에 대체로 공감한다. ‘진부화’는 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소비를 강요하는 심리적 기제, 곧 광고나 판매촉진 캠페인의 측면에서도 ‘계획적’으로 이뤄짐은 물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러한 자본주의 세상을 ‘탐욕적 소비주의’라고 비난했고, ‘쓰고 버리는 문화’가 현대 세계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교황은 이 일회성 소비의 문화를 단지 재화의 소비나 물질의 사용에 국한하지 않는다.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시장이 상품 판매를 위하여 강박적 소비주의를 촉진하는 경향이 있기에, 사람들은 과잉 구매와 불필요한 지출의 소용돌이에 빠지기 쉽다”(203항)면서 “버리는 문화는 물건을 쉽게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소외된 이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22항)고 말했다. 이 회칙에서 교황은 인간의 무분별한 소비가 자연 생태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인간 생태까지도 동시에 파괴한다며, 환경과 생태 보전의 책무를 자연 환경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로도 동시에 통합시켰다. 즉, 환경 보호와 인류 공동선의 추구는 유리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했다.

교황은 사실상 소비의 자유는 “경제적 금전적 힘을 휘두르는 소수”(203항)만이 누리고 “소비 지향적 생활양식에 대한 집착은, 특히 소수만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 때, 폭력과 상호 파괴만을 가져온다”(204항)고 힐난했다. 또 “식량 전체의 3분의 1이 버려지고 있다”면서 “음식을 버릴 때마다, 그 음식은 마치 가난한 이들의 식탁에서 훔쳐 온 것과 같은 것”(50항)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아주 명확하게 해답을 제시한다. “구매는 단순히 경제적인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도덕적인 행위”(206항)이고 따라서 “환경 훼손의 문제는 우리의 생활양식을 반성하도록 촉구”(206항)한다. 하지만 “개인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219항) ‘공동체의 협력망’을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 “지속적인 변화를 이루는 데에 필요한 생태적 회개는 공동체의 회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