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물관 문화 순례]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 4

신정숙 수녀(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 소장),사진 인보성체수도회 제공
입력일 2015-12-15 수정일 2015-12-15 발행일 2015-12-20 제 2974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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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계명 실천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던 여정
1965년 대성리 농장에서 명상 중인 윤을수 신부.
윤을수 신부의 유물관에 들어서면 마치 윤을수 신부가 일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일만큼 책상 위에 그가 사용하던 물품들이 진열돼 있다. 성경, 십자고상, 타자기, 편지봉투 오픈 칼, 자, 시계, 도장, 그리고 담뱃대와 재떨이…. 윤을수 신부는 하느님을 사랑 지극하신 어버이로 모시고 산 믿음의 사람이다. 생명으로부터 시작해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시며 언제나 자식으로 대하시는 어버이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고 의탁해 마음의 동요 없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이상을 따라 이 세상을 살아나간 행복한 신앙인이자 사제요 그리스도의 제자다. 그런 그의 인생 행복관, 그의 세계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책상 위 풍경이다.

윤 신부는 서품 직후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인 1930년대 초 「가톨릭 청년」에 ‘성서 원문’, ‘성서역문의 역사적 고찰’, ‘성서해석에 대한 고찰’, ‘성서에 대한 성신 감도’, ‘성서의 고유한 특장(特長)’, 그리고 모세오경과 여호수아기, 룻기에 대한 글을 기고했을 만큼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성경은 그에게 곧 빼고 더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말씀이자 명령, 길이자 진리였던 것이다. ‘스승이며 주님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유언으로 받들어 그날 밤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을 평생 자기의 ‘일’로 삼았던 윤을수 신부다.

그래서 그는 묵주기도와 성인전에는 열심이지만 성경읽기는 소홀했던 초창기 인보성체수녀들에게 “성경을 읽어라!” 하고 강조했다. 아직 성경을 그리 자주 읽지 않고 있던 1950년대 후반의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하며 윤을수 신부는 그의 수녀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가 아니라 진정한 인격을 가지고 사는 사람, 사람답게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에게 수도생활은 우리 인격의 원형이요, 참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닮는 것, 그분이 가신 길을 고스란히 따라가는 데서 행복을 구하는 제자됨이다.

윤 신부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은 전시관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십자가다. 그에게 십자가는 책상 앞에 놓고 공경하고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장식품이 아니라 그가 따라야 하는, 상처 입고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는 예수님의 얼굴이었다. 모욕, 천대, 죽음의 증상이고 ‘고통의 상징이자 열 번, 스무 번, 백 번, 천 번의 용서를 할 수 있다는 증표’다. 그래서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을 잘 참아 받는다는 것이요,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랑이다. 고통을 참아 받음은 제욕, 즉 욕구를 절제하고 자기를 다스리는 덕을 닦는 것이다. 자기 스승 예수를 본받아 윤을수 신부는 많은 시련과 오해, 억울한 일을 당하고 누명을 쓰면서도 변명하지 않는 자세를 지향하여 살았다.

그렇게 참고 걸어가는 길이 어찌 어렵고 힘들지 않았을까! 전시관에 고즈넉이 놓인 담뱃대와 재떨이를 보면 자연스레 겹쳐지는 사진이 한 장 있다. 그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든 것을 놓고 대성리 강변에서 휴양하고 있을 때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담뱃대를 물고 흰 고무신을 신고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생각에 잠겨 강을 바라보고 있다. 오기선 신부(1907~1990)의 증언에 따르면 유학 전 동성소신학교 교사로 있을 때 윤 신부는 담배를 못 피워 원숭이 담배 피듯 뻐끔뻐끔 후 하면서 분위기를 잘 맞춰주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초창기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은 수단을 입고 흰 고무신에 지팡이를 짚은 채 담뱃대를 물고 있는 윤 신부의 모습을 많이 기억한다. 11년간의 유학생활과 미국 망명생활은 즐거운 때도 많았지만 남에게 말 못할 어려운 고통도 많았다고 했다. 한국 천주교회 첫 번째 박사 신부에게 거는 교회의 기대와는 달리 6·25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와 민중 속으로 들어가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한 그다. 그리스도의 ‘일’에만 뜻을 두고 모든 것을 묵묵히 인내하고 극복해 나가면서 하느님의 사랑으로 행복하게 살았던 그였지만 지식인이요 신앙인이며 목자로서 홀로 감당해내야 했던 고뇌와 외로움이 없지 않았을 터, 그것이 그를 담뱃대와 친하게 만든 원인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지금은 희귀 유물이 된 ‘올리베띠’(Olivetti) 타자기는 주로 윤 신부가 외국의 여러 친우들과의 서신연락과 공문 작성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내국인들과의 서신이나 문서는 손으로 직접 쓴 것이어서 구별이 된다. 그중에 적지 않은 것들이 원조를 청하거나 받은 원조에 감사하는 문서들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1962년 미국에서 수녀들과 찍은 사진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으로 짐작이 된다. 이 타자기는 그가 건강이 악화돼 1971년 미국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그의 전 재산인 조그마한 가방 속에 들어있던 유품 중 하나다.

손잡이에 성모님이 부조된 편지봉투 여는 칼은 작지만 윤을수 신부가 함께 그리스도의 이상을 나누었을 많은 인연들과 만남들을 그려보게 한다. 편지와 전보 이외에는 달리 연락방법이 없던 그 시절 윤을수 신부는 정말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수도원에 남아 있는 서신들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현재 그의 묘비에 적혀 있는 묘비명도 그가 1956년에 세운 한국 최초의 사회사업학교인 구산후생학교 졸업생에게 서신으로 직접 남겨 놓아서 쓸 수 있었다. “어머니 품에서 땅에 묻힐 때까지 나는 웃으며 행복에 넘쳐 살았다고 동서에 전해주!”

※문의 031-334-2901~2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윤을수 신부가 주로 외국의 친우들과 서신연락을 하거나 공문 작성을 할 때 사용했던 ‘올리베띠’ 타자기.
사제이자 인간으로서 윤을수 신부의 체취와 고뇌가 배어 있는 담뱃대와 재떨이.

신정숙 수녀(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 소장),사진 인보성체수도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