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물관 문화 순례]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 3

신정숙 수녀(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 소장),사진 인보성체수도회 제공
입력일 2015-12-08 수정일 2015-12-08 발행일 2015-12-13 제 2973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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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 염려하며 번역한 「준주성범」의 울림…
「준주성범」 차례(왼쪽). 윤을수 신부가 친필로 적은 「준주성범」 제1권 제1장. 「준주성범」은 성경 다음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서적으로 평가된다.
윤을수 신부는 평생 스승 그리스도의 살아오심과 가르치신 훈계를 따라 그리스도의 정신만을 항구하게 추종하려 했기 때문에 언제나 행복하게 살았던 그리스도의 제자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에게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다 헛되니 어버이신 하느님만을 믿고 신뢰하며 이 행복의 길을 걸으라고 당부한다. 윤을수 신부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인생관, 가톨릭 인생관이라고 표현한다.

이렇듯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께 중심을 둔 윤을수 신부의 인생관은 성경을 토대로 「준주성범」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윤을수 라우렌시오 신부 유물 전시관’에는 윤 신부 번역으로 1949년 성신대학교에서 펴낸 준주성범과 1955년 경향잡지사(후에 가톨릭출판사로 바뀜)에서 펴낸 준주성범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1960년대 초반 인보성체수도회 수녀들에게 아침 미사 후 「준주성범」을 풀어 영적 훈화를 했던 내용을 묶어놓은 「새감의 얼」을 볼 수 있다.

‘새감’은 윤을수 신부의 호다. ‘을수’(乙水), ‘새가 물가를 감돈다’는 뜻이다. 이 영적 훈화는 그 당시 녹음기로 녹음이 돼 있었기에 후대의 수녀들도 윤 신부의 가르침을 생생히 접할 수 있는 귀중한 유산으로 남았다. 또한 그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까지 묵상하며 새롭게 손질한 준주성범 원고도 있다. 마치 성경쓰기를 하듯이 직접 손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글씨체와 행간들에서 정갈하고 온화하며 고요하고 깊은 신뢰가 느껴진다.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그의 기도와 공경이 그러했던 것 같다. 이 수기본에는 이전 출판본에는 없는 서문이 추가돼 있고, 매 장의 끝에 ‘묵상재료’가 적혀 있다. 이 수기본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30년도 더 지난 2004년 「그리스도를 따라-묵상자료와 함께 준주성범 새롭게 읽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돼 세상에 나왔다.

윤 신부의 준주성범 번역은 그가 신학생 시절 불어를 배우면서 시작됐다. 신학교 입학 동기이자 서품 동기이며 절친이면서 서로에게 연마를 위해 더없이 좋은 경쟁자이기도 했던 오기선 신부(1907~1990)의 증언에 의하면 윤 신부와 둘이 1922~1923년 사이부터 홍요한 선생을 통해 침실 이불 속에서 몰래 불어를 공부했다. 그 시절엔 라틴어 외에 다른 언어 공부는 절대금지였다. 만약 다른 언어를 공부하다 발각되면 학교를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어 공부를 했던 것을 보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새로운 세계를 알고자 하는 갈망이 무척 깊었던 것 같다. 실제로 두 사람은 침실 검색에서 불어 공부하던 것이 들통 나 책을 몰수당하고 교장 신부에게 불려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다행히 쫓겨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고해성사를 위해 찾아간 차 엘몬도 신부의 허락과 응원 덕분에 이들의 불어 공부는 계속될 수 있었다. 불어에 어느 정도 귀가 열리고 눈이 뜨이게 되자 윤 신부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준주성범」 불어판 포켓용을 입수해 밤낮 틈만 나면 그것을 ‘조막손이 곤 달걀 만지듯 조몰락거리며’ 번역했다. 그는 거기 나오는 일화, 미담, 비유들을 동기들에게 들려주곤 했고 1942년 8월 15일 성신대학에서 한국말 판 「준주성범」 초판을 발간하게 됐다고 회상한다. 현재 윤을수 신부 유물 전시관에는 1942년 초판본 「준주성범」은 없다. 그러나 1949년 11월 20일자로 성신대학에서 펴낸 「준주성범」에 보면 1942년에 초판된 것을 재판하는 것으로 나온다. 경향잡지 1949년 12월호는 “가톨릭 세계에서 복음성서 다음으로 넓게 애독되는 「준주성범」이 나왔다”고 소개하면서 총 270페이지, 가격은 350원, 등기우송료는 80원이라고 알린다. 1949년은 윤을수 신부가 성신대학 학장으로 있던 시기다. 이후에 출판되는 것과 비교해 다른 점은 각 권의 명칭을 첫째 매, 둘째 매, 셋째 매, 넷째 매라고 한 것이다.

절판됐던 「준주성범」은 1955년 6월 20일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돼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오기선 신부의 동생 오기순 신부(1910~1993)는 윤을수 신부를 회상하며 그의 저서와 역서들이 많지만 당시 한국교회의 영성 면에 큰 공헌을 한 것이 「준주성범」 번역이라고 증언한다. 「준주성범」은 사제들과 수도자들, 모든 교우들의 영적 독서로 읽혀졌고, 사제들의 강론에 인용되고, 그 시대 한국교회의 영적 지침서 역할을 했다. 1950년대 초반 이 책에 대한 갈망이 상당히 깊었다는 것은 1954년도 후반기 경향잡지에 「준주성범」이 곧 나올 것이라는 공지가 계속되는 사실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방에 십자가는 꽂혔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는 산삼처럼 드물다”며 교회의 세속화를 염려했던 윤을수 신부에게 「준주성범」은 오래전에 쓰인 것이지만 현대인에게도 유효한, 성경 다음가는 인간생활 지도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이르는 길의 안내서이기도 하다. 믿는 사람들이 매일 조금씩 이 책을 읽고 묵상하여 세속주의와 그리스도주의를 구별하고, 양심을 따라 살아가며 진선미이신 하느님과 일치해 살아가는 친밀한 생활로 인도되는 가운데 세상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등불이 되는 것. 이것이 「준주성범」을 펴내는 그의 지향이었다.

※문의 031-334-2901~2 인보성체수도회 용인수도원

「준주성범」의 변천을 보여주는 시대별 출판물들.
윤을수 신부가 「준주성범」을 풀어 수녀들에게 훈화할 때 사용한 녹음기.

신정숙 수녀(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 소장),사진 인보성체수도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