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물관 문화 순례]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 4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사진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
입력일 2015-11-10 수정일 2015-11-10 발행일 2015-11-15 제 2969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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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전교약기」에 드러난 생생한 개항기 교회 실상
「젼라도전교약긔」의 구술자인 박제원(요셉, 1854~1935). 박제원은 복사로서 사제 바로 곁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전라도 지역 전교사와 개항기 한국천주교회의 실상을 증언했다.
박해기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개항기를 거치면서 내·외부적인 변화를 맞게 됐다.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 이후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와 정부 정책이 변했고, 내부적으로는 한불수호조약 체결 이후 선교사들에게 전교의 자유가 주어졌다. 병인박해 이후 추진해 오던 교회 재건운동은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이 같은 개항기 한국천주교회에 대한 상황을 잘 알 수 있는 유물로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기록해 놓은 자료들과 관변자료가 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천주교 신자가 직접 기록한 자료는 드물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젼라도전교약긔」(이하 전교약기)는 신부를 모시고 활동하던 복사가 직접 쓴 최초의 글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이 글은 개항기 전라도 지방에서 복사로 활동한 박제원(朴齊元, 요셉, 1854~1935)이 구술한 전라도 전교사(傳敎史)다. 이 사료는 개항기 전라도 천주교회의 전교사를 다루고 있지만 개항기 한국천주교회의 실상을 알 수 있게 하며, 신부 곁에서 일했던 복사가 직접 구술했다는 점과 다른 기록과 비교해볼 때 연대적으로나 내용 면에서 오기된 사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아 가치가 크다.

박제원은 1854년 경상도 거창군 적하면 개화동에서 출생했다. 1885년 박중현(안드레아)의 인도로 전라도 진안 방각리에 와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죠스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사망하기까지 약 30여 년간 9명의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의 복사로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했다. 또 수년간 대구에서 명도회 강사로도 선임돼 활동했다. 69세가 되던 해에 시력을 상실했는데, 그 후 주재용 신부의 권유로 전라도전교약기를 구술했고, 몇 편의 천주가사를 작사했다.

전교약기는 연구소에 두 권이 소장돼 있다. 모두 한글 고어체로 작성됐는데, 하나는 붓글씨 본이고 다른 하나는 펜글씨 본이다. 붓글씨 본 첫 페이지에는 박요셉(제원)이 저술자로 돼 있고, 필기인은 김베드루(만수)로 적혀 있으며, 필기 시작한 날을 1933년 2월로 적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용안 동지산리에서 1933년 3월 14일에 필기를 마친 것으로 돼 있다.

펜글씨 본 첫 페이지에는 박요셉(제원)이 저작자로, 필기자는 박비리버(비리버는 필립보의 옛 표기)로 돼 있으며, 필기 시작한 날을 붓글씨 본과 같이 1933년 2월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1933년 2월에 필기를 마친 것으로, 1934년 2월 5일에 김 미카엘이 부기(附記)를 한 것으로 돼 있다.

붓글씨 본은 나바위성당 인근에 살던 박제원 복사의 손자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펜글씨 본은 전주교구 서정수 신부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호남교회사연구소 초대 소장 김진소 신부가 기증받은 것이다. 두 본의 차이는 붓글씨 본에는 나오지만 펜글씨 본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 몇 군데 있고, 펜글씨 본에 있는 부기가 붓글씨 본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

전교약기 두 본을 종합해 보면, 그 주제는 대략 네 가지다. 첫 번째 주제는, 박제원 자신의 생애에 관한 일이다. 즉 그의 출생과 성장에 대한 내용과 박중현을 만나 전라도로 이주하는 과정, 그리고 세례를 받고 프랑스 신부들의 복사로서 활동하게 된 계기를 밝히고 있다. 박중현은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블랑 신부를 도와 교회의 중대사를 도맡았던 인물이었다.

두 번째 주제는, 1885년부터 약 10년간의 내용으로 박해로 인해 침체됐던 전라도 지역 천주교회의 재건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는 특히 당시의 전교활동 모습과 전라도 지역 교우촌의 현황 등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주제는, 동학농민운동과 전라도 교회에 관한 내용이다. 이 내용에서는 동학 농민군으로부터 전라도 교회가 어떤 침탈을 당했는지, 또 선교사들이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알 수 있다.

네 번째 주제는, 전라도 각지의 성당 건립에 관계된 내용이다. 즉 되재성당, 전동성당, 수류 옛 성당, 나바위성당의 설립에 대한 기록들이다. 또 1899년 나바위성당에서 발생한 강경포 교안사건의 발단과 전개과정 그리고 결말에 대한 내용도 알 수 있다.

이 자료에 대해 더 필요한 연구는 한국사와 한국천주교회사의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사건 하나하나에 대한 사료적 가치를 더 검증해야 하고, 다른 사료들과의 대비를 통해 빠진 부분과 고유한 부분을 분석 보완해 사건들에 대한 종합적인 윤곽이 드러나게 하는 일이다. 이 사료가 개항기 한국사와 한국천주교회사의 내용을 더 풍요롭게 하는 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앞서 소개한 자료 외에도 호남교회사연구소에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 자료들이 많이 소장돼 있다. 그중에서도 「성무일력」, 「매일 축일표」, 「첨례표」, 「자책」, 「목판본 주교요지」, 「천주성교공과」, 다수의 천주가사집 등은 다른 곳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과 비교해 볼 때 특별한 가치가 있다.

※문의 010-6689-2070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이영춘 신부

「젼라도전교약긔」 붓글씨 본(왼쪽)과 펜글씨 본. 연대적으로나 내용 면에서 오기된 사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아 사료적 가치가 크다.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사진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