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물관 문화 순례]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 3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사진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
입력일 2015-11-03 수정일 2015-11-03 발행일 2015-11-08 제 2968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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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노래한 천주가사… 선조들 믿음살이 보여
천당을 그리워했던 신앙선조들의 삶을 보여주는 천당도. 천당은 후세가 아니라 현세에서 시작된다는 믿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는 시편이 있고 한국 천주교회에는 천주가사가 있다. 천주가사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시작되고 성장한 한국교회가 신앙을 섭취하고 소화해 만든 노래다. 지식인 신자들과 성직자들이 일반 신자들, 특히 글을 모르는 신자들의 교리교육과 신앙의 활성화를 위해 만들었다. 그래서 천주가사의 주 교육 대상은 글을 모르는 여성들이었다. 이들이 쉽게 교리와 신앙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했고, 당시의 가사형식(4·4조)을 빌려 작사했다.

노래의 내용이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의 구원을 갈망하기에 ‘천당 노래’ 또는 ‘천당 강론’이라고도 했다. 어린이들은 5~6세가 되면 할머니나 어머니와 더불어 주요 기도문과 함께 천주가사를 배워 천당을 노래하고 꿈꾸었다. 여인들은 어디서나 천당 노래를 부르며 시련과 고통을 넘어 공포와 죽음을 극복했다.

호남교회사연구소 초대 소장 김진소 신부는 교회사 사료를 수집하면서 평소 신앙선조들이 ‘무엇으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늘 궁금했는데, 어떤 자료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답을 바로 ‘천주가사’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신앙선조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문화를 총동원해 교리를 이해하고 섭취했으며, 그것을 천주가사에 담았다. 그래서 사료 수집 가운데 특별히 천주가사에 관심을 집중한 것도 천주가사가 박해시대 신자 대중의 생각과 믿음살이를 가장 잘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천주가사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얼 속을 더듬어 찾는 자들의 발소리요, 한국의 전통 안에서 하느님과 끈질기게 속삭이는 기도요, 이 겨레의 얼을 가지고 하느님의 사랑에 신들린 자들의 노래였던 것이다.

호남교회사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천주가사집에는 표에서 보듯 여러 종류의 필사본들이 있다.

이 중 대표적인 작품은 김지완본의 「사주구령가」일 것이다. 이 가사집은 1850~1860년대의 천주가사집으로서, 1866년 서울에서 순교한 이 암브로시오가 수집, 복사해 놓은 천주가사들을 1917년 그의 손녀사위인 김지완이 전사한 필사본으로, 크기는 21cm×16cm, 분량은 202면이며, 매 면은 16행으로 돼 있다. 「사향가」, 「삼세대의」, 「피악수선가」를 비롯해 총 21편이 수록돼 있는데, 이는 천주가사들 중 중요한 내용의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중 14편은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의 저작이고 나머지 7편은 저작자가 분명치 않다.

천주가사들 중 중요한 내용의 대부분을 수록하고 있는 김지완본 「사주구령가」.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천주가사는 1850년대를 시작으로 1930년대까지 작사된 것이다. 1850년대 천주가사는 대부분 최양업 신부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가 지은 가사로 확실히 인정되는 것은 「사향가」다. 이 노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영원한 본향인 천당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도록 호소하는 경세가(警世歌)의 일종이다. 사향가는 「피악수선가」와 함께 신자들에게 가장 많이 보급된 가사다. 그래서 마치 교과서처럼 다른 천주가사들이 이 가사의 내용을 모방하고 표절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선종가」와 「7성사가」, 「삼세대의」, 「천당강론」, 「지옥강론」, 「십계강론」 등의 가사도 최양업 신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천주가사들이 대부분 신앙교육과 교리교육에 그 내용이 집중돼 있지만, 개인의 신앙고백이나 공동체의 경사를 노래한 내용도 여러 편 있다. 그런 천주가사들 중에는 교회사의 중요한 내용들을 알려주는 자료도 있다.

「리별가」는 호남지방의 첫 사제 이내수(아우구스티노) 신부의 동생 이성수(프란치스코)가 쓴 천주가사다. 이내수 신부는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1897년 호남의 첫 사제로 서품을 받았지만 병으로 인해 1900년 전남 무안에서 선종했다. 동생 이성수는 형의 부음을 듣고 찾아갔지만 이미 형이 묘에 묻힌 다음이라 통탄을 하고 집에 돌아와 형이 19세에 신학공부를 위해 떠나는 장면부터 선종하기까지의 일을 199절 천주가사로 표현했다. 이 가사는 이내수 신부의 일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복사로서 전라도에서 활동한 아홉 분의 선교사를 모신 박제원(요셉)은 무리한 활동이 원인이 돼 시력을 잃고 소경이 된 후 몇 편의 천주가사를 작사했다. 그 중 「소경탄식가」는 자신이 소경이 된 처지를 읊은 애가(哀歌)다. 그러나 이 가사의 내용은 연약한 애상의 푸념이 아니었고, 육신의 소경이 당하는 고통을 눈물로 부르짖으며 동시에 영혼의 소경 되는 비참함을 경계하는 다짐의 노래였다.

천주가사와 함께 천당을 그리워했던 신앙선조들의 삶을 잘 알 수 있는 그림이 있다. 「천당지옥도」다. 이 그림의 작가는 알 수 없다. 19세기 경 중국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인물과 복장 등에서 중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대단히 토착화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죽은 이들이 각각 천당과 지옥에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선조들은 위령성월이나 상을 당했을 때, 이 그림을 걸어놓고 연도를 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을 통해 묵상할 수 있는 더 깊은 의미는 신앙선조들에게 있어 천당이란 복자 황일광(시몬)이 고백했던 것처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문의 010-6689-2070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이영춘 신부

♣ 알려왔습니다

본지 11월 1일자 13면 ‘박물관 문화순례’ 호남교회사연구소 문서고2 기고문에서 유항검 일가족 묘가 치명자산으로 이장된 해는 1904년이 아니라 1914년이라고 호남교회사연구소에서 알려왔습니다.

이영춘 신부(호남교회사연구소장),사진 호남교회사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