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물관 문화 순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 (중)

전종희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사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입력일 2015-10-06 수정일 2015-10-06 발행일 2015-10-11 제 2964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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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료 활동 자료에 담긴 수녀들의 선교 열정
프랑스 샬트르의 작은 지방 러베빌에서 1696년 소수의 처녀들로부터 출발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여자 수도회로서는 처음으로 1888년 당시 조선의 제물포항에 첫발을 내딛고 서울에 둥지를 틀었다. 가난하고 피폐한 조선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27년 후 1915년에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초대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에 의해 초대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이하 대구 수녀원)이 설립됐다. 대구 수녀원의 설립과 더불어 시작된 수도자들의 생활 역시 희로애락이 함께하는 가운데 성장해 나갔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안에서 수녀들은 닥쳐오는 여러 형태의 시련을 극복해 나가면서 대구교구(당시는 영·호남, 제주까지 관할)의 복음화를 위해 매일의 사도직 활동을 착실히 전개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구 수녀원 수녀들의 지난 100년간의 활동은 옛 사진과 수녀들이 사용하던 일상 용품, 성물, 유해 등 유물을 통해 대구 수녀원 역사관 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역사관 소장품 중에서도 대구 수녀원이 전개한 교육과 의료 사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들이 방문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특히 당시 수녀들이 봉사하던 학교는 주교와 신부만이 아니라 학부모들과 지역 사회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수녀들은 기도 시간과 수녀원 생활 외의 나머지 시간을 모두 아이들 교육에 정성을 쏟았기 때문이다. 다음의 인용 구절들은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구교구 내에서 가장 잘 되어 가는 것은 확실히 여학교입니다. 이 학교를 이끌어 가고 있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한국인 수녀 4명은 놀라우리만큼 그들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수녀들은 마치 학생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며, 학생들은 선생을 부모보다 더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수녀들의 학교가 이처럼 성공한 원인은 한국인들의 가정으로부터 수녀들만이 이런 교육을 하고 있고 또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받은 데에 있음이 분명합니다.”(1921년 대구교구 연보)

1915년 10월 대구 수녀원 설립과 더불어 고아원이 운영되면서 원아들을 위한 약국(요셉무료시약소)이 개설됐고 이로 인해 대구 수녀원 초창기부터 수녀들의 기본적인 의료 활동이 시작됐다. 이후 의료 사도직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수녀들이 가정방문을 통한 의료 활동을 시작한 것은 기록상으로 1928년부터다.

대구교구 드망즈 주교는 성직자들이 잇따라 사망하자 교구 내 성직자들을 위한 병원을 짓기로 결심하고 1931년 성직자들을 위한 의무실과 휴식처로 사용할 2동의 건물을 완성했다. 이 요셉무료진료소는 본래 성직자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부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간의 치료와 약품을 제공하면서 많은 환자들이 몰려와 1년이 못돼 증축이 불가피해졌다. 이에 드망즈 주교는 일반 진료소에 적합한 새 건물을 짓기로 했다. 새 무료 진료소는 95평 건물로 1934년 7월 16일 축성됐다. 이와 같이 대구교구에서의 활발한 의료 활동은 실질적으로 수녀들에 의해 이뤄졌으며 많은 개종자와 영세자를 얻어 교회 내 선교활동에도 크게 공헌하게 됐다. 이 사실은 1929년 대구교구 연보에서도 증명된다.

“프랑스인 수녀 한 명과 조선인 수녀 한 명이 매일 읍과 촌락으로 환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이 활동은 아주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작년 10월 중순부터 금년 6월 초순까지 1,893명의 환자들을 방문하였고 4명의 성인과 53명의 외교인 자녀가 대세를 받고 죽음을 맞도록 하였습니다.”

본 기고에서 잠시 대구 수녀원이 고아원을 운영한 사실을 언급했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15년 대구 수녀원 설립과 동시에 드망즈 주교는 그 당시 계산동본당 김보록 신부가 교우 가정에 위탁해 양육 중이던 고아 30여 명을 수녀들에게 다시 위탁했다. 아이들의 방이 마련되지 않아 수녀원 내의 작은 방에서 양육하기 시작한 것이 보육원 설립의 시초다. 수녀들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1925년 백백합보육원 건물을 지어 아이들을 계속 돌봤다.

아이들의 수가 점점 증가해 1947년에는 250명이 됐고, 6·25 후에는 400명의 아이들을 수용했다. 수녀들의 헌신적인 돌봄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이들에게 심리적인 보살핌이 필요함을 느껴 영아만 양육하기로 하고 6세 이전의 아이들은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외국으로 입양 보냈다. 그리고 남은 일부 아이들은 고등학교 교육과 기술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배려했다. 그 후 보육원 고아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어 1988년부터 1991년 2월까지 ‘일시 보호소’로 운영하다가 1991년 3월부터 이 지역의 영세민 자녀들,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 다문화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현재의 ‘백합어린이집’으로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수녀들의 모든 활동 안에 함께 해 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

※문의 010-2924-2646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 담당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에서 수업을 담당했던 1939년 효성여자보통학교 국어시간 모습.
백백합보육원 원아들과 그들을 돌봤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수녀들의 모습. 연대는 확실치 않다.
성요셉 진료소에서 사용한 주사바늘.

전종희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수녀원 역사관),사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