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신나고 힘나는 신앙-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136)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53) - 구세주의 양부, 요셉

차동엽 신부
입력일 2015-10-06 수정일 2015-10-06 발행일 2015-10-11 제 2964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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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결한 남편, 성실한 아버지’ 역할 다한 으뜸 성인
■ 기구망측한 운명

고 구상 시인은 그의 명시 ‘나자렛 예수’에서 예수님의 일생을 ‘기구망측한 운명’이라 노래했다. 그에 못지않게 ‘기구망측한’ 인생을 산 인물이 바로 오늘 주인공 요셉이다.

본디 요셉은 비록 직업이 목수였지만, 다윗의 후손으로서 뼈대 있는 가문출신이라는 자긍심으로 살고 있었다. 변방 갈릴래아 지역 나자렛 고을의 선남 요셉은 같은 동네 대표선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다. 그때만 해도 그는 누구와도 비교를 허락지 않는 행복한 사나이였다.

그런데 웬걸! 그는 우연히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마태 1,18 참조).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뜨겁게 사랑하는 약혼녀의 일신상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것이 비정상일터다. 동침한 적 없는데 임신이라? 그는 충격을 추스르면서 순간적으로 궁굴려 추측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도대체 어느 놈의 아이일까?”

당시 요셉의 심경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셉이 통속적인 의미에서 ‘의로운 사람’이었다면 마리아와의 관계를 ‘법’의 논리로 처리했어야 맞다. 만일 그랬다면 마리아는 율법의 전통에 따라 간통죄명으로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의 의로움은 격이 다른 의로움, 곧 하느님 앞에서의 의로움이었다. 하느님 보시기에 흠도 티도 없는 사람! 곧 정의의 추를 사용하되 그 반대 측에 용서와 배려의 추로 균형을 잡을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요셉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법에 호소하는 대신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파혼해 주는 배려를 선택했다.

“이제 내가 파혼을 해 주면, 아기 아빠와 마리아가 알아서 다시 약혼을 하든, 결혼을 하든 하겠지.”

요셉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빗발칠 질문을 예상 못했던 것이 아니다.

“너 미쳤냐? 그렇게 예쁜 여자를 말이야. 또 성품은 어떻고. 너 어쩌려고?”

이런 식으로 물어오면, 요셉은 필경 이렇게 답할 요량이었으리라.

“성격 차이야. 다 좋아도 성격이 안 맞으면 못 사는 거야!”

요셉은 마리아의 ‘혼외’ 임신 사실을 끝까지 발설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요셉의 속쓰림은 거기까지였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것 자체도 느끼지 못할 만큼 경황없게 전개된다. 요셉이 저렇게 마음을 굳혔을 때,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말한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1).

더 이상의 구구한 설명도 필요 없게 되었다. 의인 요셉은 이 말씀으로 모든 것을 알아들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생애가 ‘기구망측한 운명’이 될 것임을 직감했지만, 슬프지 않았다. 그의 선택 역시 마리아의 경우처럼 “주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소서”였다. 그러기에 그는 영락없는 의인인 것이다.

■ 행복한 들러리

시쳇말로 ‘바지’ 남편에 ‘바지’ 아버지! 심경이야 어땠건, 복음서 전체를 일괄할 때, 요셉은 이 들러리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마리아 임신 쇼크 때 요셉의 마음 씀씀이로부터 유추하건대 요셉은 자신의 특별한 역할을 행복해했을 듯 짐작된다.

복음서 속 예수님의 유년기 이야기에서 요셉의 역할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호적등록 차 베들레헴으로 임시 귀향 및 예수님의 탄생(루카 2,4-6 참조), 꿈에 나타난 주님 천사의 계시로 헤로데의 영아살해를 피해 이집트로 이주(마태 2,13-15 참조), 다시 꿈속 천사의 계시를 따라 나자렛 고을 정착(마태 2,21-23: 루카 2,39 참조) 등등. 말이 여정이요 이주지 교통과 숙박여건이 열악했던 당시 상황에서 연약한 아이와 여자에게 요셉의 존재는 얼마나 든든하였을까.

복음서에서 요셉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 파스카 축제 때 3일 동안 실종되었다가 성전에서 다시 찾은 사건 기록 이후, 뚝 끊긴다. 열두 살이면 성인식을 치를 나이다. 대강 그 언저리까지 아버지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요셉에게 부여된 배역이 아니었을까 싶다.

눈에 띄는 대목은 그 사건 이후 예수님이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잠시나마 요셉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는 사실(루카 2,51 참조)과 서른 살쯤에 활동을 시작한 예수님을 사람들은 요셉의 아들로 여겼다는 사실이다(루카 3,23 참조). 이는 그만큼 요셉이 친아버지 이상으로 아버지 역할을 훌륭히 살아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 최측근 전구자

인간적인 고충이 없지 않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상에서 성모 마리아와 요셉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과 요셉의 관계는 부인할 수 없는 특권이다. 그러기에 요셉은 성인들 가운데 으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교회 (기도) 박사 대 데레사 성녀는 요셉의 전구가 큰 효력을 지녔다고 증언한다. 오늘 그는 하늘에 우뚝한 예수님의 최측근 전구자인 것이다.

그는 전구를 청하는 이들을 위하여 어떤 변론으로 천주성삼을 설득할까? 천상 직관 소통의 무음 기도에 귀 기울여 본다.

지상에서, 저를 ‘아버지’로 불렀던 성자 예수님!

한 번 아들은 영원한 아들,

지상 아비 소청 좀 들어주셨으면.

저 아래 어드매 아무개가 천근 시름에 겨워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를 연호하며

울부짖는 소리

시리도록 폐부를 파고드네요.

지상 아비 애통을 보사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면.

지상에서, 제 아내 마리아의 참 정배로서

육으로 남남인 부부지간에 ‘거룩한 결속’이 되어 주신 성령님!

그 특은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탄원하는

뿔뿔이 인생들에게도 내리소서.

만리장성의 사연을 지닌 채

찢어지고 터지고 파편화된 가족애의 시신을 부여안고

망연자실한 눈동자들에게

치유의 빛을 비추소서.

위장 부부인 저희에게 그리하였듯이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끈으로

저들을 묶어주소서.

지상에서, 당신 아드님을 제게 맡기시어

양부(養父)의 영광을 누리게 해 주신 성부 하느님!

그 신뢰(의탁) 영원토록 폐하지 마소서.

제 생애, 허술했던 무녀리 삶을

겸덕과 섬김의 본으로 여기고

“성 요셉, 저를 위하여 빌으소서” 노래하며

터럭만큼이라도 닮아보려고 용맹정진하는

아마추어 수도자들의 기염에

제 영적 부성(父性)이 덩달아 춤을 추네요.

아낌없는 제 응원 값으로 쳐주시어

저들의 한 걸음 한 걸음에 부디 강복하소서.

천국에서 어떤 말과 무슨 논리가 필요하겠는가. 척하면 삼천리, 모든 것이 직관소통으로 이루어질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언어 소통이 지상의 언어를 입게 되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차동엽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