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물관 문화 순례]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하신혜(마리아·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학예사),사진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제공
입력일 2015-04-07 수정일 2015-04-07 발행일 2015-04-12 제 2939호 18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순교자 십자가와 묵주에 신앙의 흔적 생생
은이 미리내 골배마실 등 교우촌에서 유물 기증
‘이암 권일신 십자가’는 대이어 간직한 집안 보물
질그릇 흙으로 만든 ‘배론 교우촌 십자가’도 특별
병인박해(1866) 강화도 순교자 묘에서 출토된 성모상.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은 순교자 관련 유물의 보고다. 이 유물들은 박해를 피해 교우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이룬 은이, 미리내, 골배마실 등의 교우촌에 살던 순교자 후손들이 소중하게 간직해 오다가 기증한 것이다. 강화도 출토 성모상, 순교자들의 십자가와 묵주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신앙선조들이 박해시대에도 굳건히 신앙을 지켰던 역사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오늘을 사는 신자들은 유물에 담긴 메시지를 찾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강화도 출토 성모상은 병인박해(1866) 순교자의 묘에서 출토됐다. 묘주는 염씨(철종의 외가) 집안의 순교자로 그 후손인 염영화(베드로)가 1975년에 기증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이며,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로 아버지는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어머니는 용성대부인(龍城大夫人) 염씨(廉氏)다. 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은 어머니 송씨와 형수인 신씨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함으로써 군호를 받지 못했지만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 그의 부인인 염씨와 함께 추증됐다. 철종의 어머니 염씨 일가도 천주교 집안이었다.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은 순교자들의 십자가를 다수 소장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손꼽히는 ‘이암 권일신의 십자가’는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인 권일신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간직했던 것이다. 십자가 하나를 통해 순교 신심이 대대로 대물림된 신비를 알 수 있다.

권일신은 조선 중기의 실학자 안정복의 사위이자 권철신의 아우다. 이벽(세례자 요한)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1785년 명례방(현 명동 부근)에 소재한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종교집회를 가지던 중 형조 관리에게 발각돼 검거되고 성물을 압수당했다. 이른바 ‘을사추조적발 사건’이다. 신분 질서가 엄연하던 시절이라 중인이었던 김범우만 형벌을 받고 권일신 등은 사대부 집안의 자제라는 이유로 훈방됐다.

그 뒤 권일신은 소위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때 이승훈 베드로에 의해 신부로 임명돼 한때 성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1791년 신해박해 때 홍낙안 등이 권일신을 천주교의 교주로 고발해 체포된 후 1792년 봄, 예산으로 유배되는 도중 옥에서 받은 상처로 객사했다. 이 십자가는 5대손인 권위연(아녜스,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이영숙 수녀의 어머니)이 기증했다.

다음으로 ‘성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의 십자가’가 있다. 장 베르뇌 주교(1814~1866)는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1855년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돼 1856년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순교하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 헌신적인 노력으로 배론(충북 제천)에 신학교를 세우고, 서울에 2개의 인쇄소를 차리며 교세를 확장해 조선교회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1868년 10월 6일에 복자 반열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 됐다. 이 십자가는 1866년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 당시 회장이었던 박순집(베드로)에게 건네준 것으로 박순집의 3대손 박원복(빈첸시오, 한국순교복자수녀회 박인숙 수녀의 아버지)이 기증했다.

‘배론 교우촌 출토 십자가’는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온 신앙 선조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옹기를 구워 생활하면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배론에서 발굴됐다. 질그릇 빚는 흙으로 만든 이 십자가들은 배론에 살던 배진례(아가다) 할머니가 1967년 약초를 캐던 중에 땅 속에 묻혀 있던 항아리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그 후 일부는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배 할머니는 경상남도 의령으로 이사 온 후 의령성당에 다니다가 의령 출신 이금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알게 돼 기증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왕조는 집권 세력의 유지를 위해 척사위정(斥邪衛正)이라는 유교적 이념에 근거해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박해했다.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에 걸친 대대적인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탄생했다. 그러나 주님 진리의 빛은 꺼지지 않았다. 신앙선조인 순교자들의 피를 통해 더욱더 밝게 이 땅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암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십자가.
성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의 십자가.
배론 교우촌 출토 십자가.

하신혜(마리아·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학예사),사진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