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물관 문화 순례]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하신혜(마리아·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학예사)
입력일 2015-03-31 수정일 2015-03-31 발행일 2015-04-05 제 2938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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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정신 깃든 초기 교회 유품의 보고(寶庫)
순교선열 신심 계승 위해 설립
교우촌 중심 전국서 유품 수집
고종손자비 기증 궁중 유물 독특
의왕비(김덕수 마리아)가 1956년 5월 서울 가회동성당에서 견진성사를 받은 모습.
곳곳에 산재해있는 성지를 비롯해 수도회, 본당 등에서 운영하는 박물관, 기념관, 전시관 등에는 한국교회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소중한 신앙유산들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러한 교회 유산들은 신앙이 이 땅에 어떻게 전래되고 뿌리내려왔는지, 또 신앙 선조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살피고 박해시기 순교 선열들의 피 끓는 신앙을 되돌아보게 하는 좋은 도구다. 이 때문에 교회 역사를 담담히 들려줄 뿐 아니라 신앙 선조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 뜨겁게 체험하고 후대에까지 이어준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가톨릭신문은 이번 호부터 전국 교회 박물관 등에 소장된 유물들을 살펴보는 ‘박물관 문화 순례’를 연재한다.

교회 박물관 등에 소장된 유물들을 톺아보면서, 우리가 잊고 지내는 교회사와 문화를 새롭게 느끼는 한편 선조들의 향기로운 신앙을 새롭게 맛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관장 배선영 수녀)은 우리나라에 가톨릭이 들어와 뿌리내리기까지 순교선열들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서 설립·운영하고 있는 가톨릭 박물관이다. 1982년 9월 25일에 개관해 33년의 역사를 지닌다.

1946년 방유룡 신부와 한국순교복자수녀회를 공동 설립한 윤병현·홍은순 수녀는 ‘순교자 현양’을 말로만 전하는 것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순교자의 유품에 새겨진 신앙심과 순교정신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여겼다. 수도회 초창기부터 순교자들이 살았던 교우촌을 중심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순교자 유품 수집에 힘쓴 이유다.

그 후 수집한 유품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사회에도 널리 알리는 작업에 매진했다. 1954년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성모성년의 해’에 서울 명동성당 계성유치원에서 개막한 ‘한국 가톨릭 사료 특별 전시회’가 그 첫 출발이었다. 이어 한국 가톨릭의 순교 역사를 대내외적으로 알리고, 순교자의 유품과 교회사 자료를 체계적으로 관리 보존하기 위해 오륜대 한국순교자기념관을 설립해 2009년 3월 박물관으로 등록을 마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의 대표적 소장품은 한국교회사 관련 유물과 순교자의 유품, 궁중 유물, 조선시대 민속품 등이다. 그중 특히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74호인 ‘의왕 원유관’(義王 遠遊冠)을 비롯한 대원군의 친묵, 망건 등의 궁중유물은 일반적으로 가톨릭 박물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유물이라 생각할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섭리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는 신비한 사연을 발견한다.

이 유물들은 고종황제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왕(義王, 1877~1955)의 비(妃), 김덕수(金德修, 1881~1964) 마리아가 기증한 것이다. 고종황제는 가톨릭을 박해한 흥선대원군의 아들이다. 흥선대원군은 가톨릭을 박해하고 탄압해 한국 가톨릭 역사에 수많은 순교자를 남겼지만 그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와 손자인 의왕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74호인 ‘의왕 원유관’은 한국사와 교회사 두 부분에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치로는 설명될 수 없는 정말 놀라운 하느님의 섭리다. 부대부인 민씨는 1896년 뮈텔 대주교로부터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의왕과 의왕비도 각각 비오와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1955년 서울 가회동성당에서 영세했다.

의왕비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와의 인연은 당시 의왕비를 모시던 이복흥(우르술라) 상궁으로부터 시작됐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외부회’ 회원이었던 이 상궁은 그 후 홍은순 수녀를 의왕비에게 소개했고, 의왕비는 홍은순 수녀를 친딸처럼 여기고 더욱 깊은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한국순교복자수녀회가 설립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순교자들의 유물과 유품, 조선후기의 역사적 자료와 민속품들을 수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소장하고 있던 ‘의왕 원유관’ 과 흑룡포, 「의왕·영왕 책봉의궤」 등 다수의 궁중 유물들을 직접 기증했다. 그중 특히 의왕 원유관은 의왕이 대한제국 수립 후 1900년 의화군(義和君)에서 의왕으로 책봉될 당시 착용했던 것으로 한국 역사의 중요한 한순간을 웅변한다.

조선시대 임금의 관모(冠帽)는 면류관, 원유관, 익선관 등이 있는데 이 중 원유관은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가 신하들로부터 조하(朝賀, 국가 경축일에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는 일)를 받을 때 강사포(絳沙袍)에 착용하는 관이다. 현재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통천관을 쓰고 찍은 사진은 남아있지만 원유관으로 현존하는 실제 유물은 의왕 원유관이 유일하다. 이것은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고 왕실 복식제도 연구에 있어 중요한 사료일 뿐 아니라 한국 가톨릭 역사 안에서도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박물관 전경.

하신혜(마리아·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