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세상 책세상] (25) 감정소비

김용은 수녀
입력일 2015-01-21 수정일 2015-01-21 발행일 2015-01-25 제 2929호 15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소비·오락 도구로 전락한 ‘감정’
스스로 감정 창조하기보다
필요에 따라 물건 사듯 구입
감정, 삶을 주관하는 힘 돼야
연극을 관람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등장한 여주인공이 외모는 평범했고 약간 뚱뚱하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약간 의아해 했지만 그녀의 연기가 워낙 뛰어나서 금방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앞에 앉은 대학생들이다. 이들은 서로 숙덕거리더니 이내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심지어 연극이 끝날 때까지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아예 고개를 들지도 않는다. 이들은 여배우의 외모에 실망해서 ‘싫다’는 감정에 딱 멈추고 만 것이다. 그래서 그 외의 시각적 정보는 물론 장면과 연출 그리고 내용과 형식 모두 놓치고 말았다. 배우는 자신이 지닌 모든 감각을 열어 열연했지만, 이들은 ‘싫다’는 감정 때문에 모든 감각을 닫아버렸다.

독일의 문화비평가인 벤야민은 오늘의 대중예술은 더 이상 몰입하여 집중하며 관조하는 대상이 아닌 그저 보고 듣고 즐기기 위한 감각적 대상이라고 한다.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을 분산시키는 오락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중예술을 자신들의 감각을 충족시켜주는 오락으로 즐겨온 젊은이들에게 여배우의 외모는 매우 중요했다. 이들은 일단 시각적 욕망에 좌절되어 더 이상 몰입할 수 없었던 게다. 한마디로 연극은 감상해야 할 예술적 창작물이라기보다 소비하는 상품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감상하고 비평하는 관객이 아닌 피동성에 익숙한 고객이며 소비자인 것이다.

소비자는 즐거운 감정을 스스로 창조하기보다 자신의 감각만족도에 따라 클릭 한 번으로 ‘예’ ‘아니오’로 결정한다. 그래서 싫고 좋은 감정도 뚜렷하다. 싫으면 절대로 구매할 수 없다. 언제나 흥미 있고 재미있는 오락적 대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산만하여 집중이 안 된다.

“책이 싫어” “난 그 사람과 마주하기도 싫어” 게다가 “그냥”이라는 말이 더해지면서 더 절망적이다. “그냥 싫다”는 말보다 더 슬픈 말이 또 있을까? 싫다는 감정으로 모든 감각을 닫아버린다. 다만 필요할 때마다 감정을 물건 사듯 구입한다. 외로우면 영화에서 재미를, 슬프면 텔레비전에서 웃음을, 고독하면 SNS를 통해 친구를 구매한다. 이렇듯 허전한 마음에 무언가 하나씩 채우지만 결국 감정이란 것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느끼는 것임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러므로 넘치도록 웃어도, 넘치도록 소통해도, 넘치도록 즐겨도, 여전히 허전하고 외로운 이유다.

자본주의 세상에서의 소비는 감정이라고 한다. 따라서 감정적으로 약한 어린이와 여성은 광고 전략의 주요 대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생각을 저만치 밀어내는 우리의 감정은 소비와 오락의 도구가 되어가는 듯하다. 생각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동화된 시스템 안에서 즐기는 감각적인 감정에 점점 더 익숙해진다. 어쩌면 감각적 즐거움을 주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는? ‘그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자본이 우리를 속인다 해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필요는 없다. 대중예술이 상업화되어가는 현실에서도 여전히 관객은 적극적인 비평가이며 의미를 재생산하는 창조자여야 한다. 우리의 감정은 소비가 아닌 삶을 주관하는 힘이 되어야 하니까.

김용은 제오르지아 수녀(살레시오수녀회)는 미국 뉴욕대(NYU) 대학원에서 미디어생태학(Media Ecology)을 전공하고, 버클리 신학대학원(GTU, Graduate Theological Union)의 살레시오영성센터(ISS)에서 살레시오 영성을 수학했다. 현재 부산 ‘살레시오 영성의 집’ 관장을 맡고 있다.

김용은 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