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 산책] (18) 페르낭 레제와 ‘성모호칭기도’

조수정(미술사학자)
입력일 2014-10-28 수정일 2014-10-28 발행일 2014-11-02 제 2917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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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빛으로, 장미 화로 변신한 ‘아베마리아’
1946년 당대 최고 예술가 20여 명이 모여 협업
교회에 봉사하는 현대미술의 새 가능성 제시
프랑스 앗시 소재 노트르담 드 뚜뜨 그라스 성당 입구 ‘성모호칭기도’ 모자이크화
페르낭 레제(Fernand Leacuteger, 1881~1955)는 입체파 운동에 참여한 프랑스 화가로, 기계적이고 다이내믹한 움직임으로 파악한 인물과 정물을 기하학적 형태와 명쾌한 구도로 그려냄으로써 현대 추상화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그는 굵은 검은색 테두리 안에 균일한 단색을 넓게 칠하는 독특한 표현법을 사용했는데, 그의 작품에는 원통형(tube)이 자주 등장했기 때문에, 튜비즘(Tubism) 또는 튜비스트(Tubist)라는 용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는 유화, 소묘, 판화는 물론, 조각, 벽화,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 태피스트리, 무대와 의상 디자인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재능을 발휘하였고, 영화제작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으로 건너가 있던 레제는,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예술 활동을 재개하게 되는데, 1946년에는 노트르담 드 뚜뜨 그라스(Notre-Dame-de-Toute-Gracircce: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 성당의 파사드(faccedilade: 정면)를 위한 모자이크화를 완성했다. 프랑스 동남부의 오뜨 사부아(Haute-Savoie)지역, 몽블랑 산맥이 바라다 보이는 해발 천 미터의 고지대 마을 앗시(Assy)에 자리잡은 노트르담 드 뚜뜨 그라스 성당은 당시 프랑스 성미술(L’Art Sacreacute) 운동을 주도했던 쿠튀리에 신부(Marie-Alain Couturier OP, 1897~1954)가 앙리 마티스, 피에르 보나르, 장 뤼르사, 조르주 브라크, 마르크 샤갈, 조르주 루오, 그리고 페르낭 레제를 비롯하여 총 20여 명의 당대 최고 예술가들에게 의뢰해 제작한 작품들로 장식된 곳으로, 20세기 성미술 운동의 귀감이라 할 수 있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예술적 업적의 탁월성을 기준으로 각자의 신념이나 종교성과는 무관하게 성당장식에 참여하도록 초대되었으나, 그들 모두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고,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산 속의 이 작은 성당은 당대 미술운동을 대표하는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됨은 물론, 현대미술이 교회에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성모호칭기도(Les Litanies de la Vierge)>라는 제목이 붙은 레제의 거대한 모자이크화는 노트르담 드 뚜뜨 그라스 성당의 입구를 마치 현대미술 전시장처럼 바꾸어 놓았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의 화려한 원색과 굵은 검정색 테두리, 그리고 기하학적인 모양은 레제의 전형적 표현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림의 주제는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된 레제가 즐겨 그리던 기계문명이나 혁명사상을 고취시키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태양처럼 빛나는 성모 마리아와 교회에서 바치는 성모 마리아의 다양한 호칭 기도이다. 왼편으로부터, 신비로운 장미(Rose mystique), 존경하올 그릇(Vase d’honneur), 샛별(Eacutetoile du matin), 상지의 옥좌(Trocircne de sagesse), 닫힌 정원(Jardin fermeacute), 다윗의 탑(Tour de David), 정의의 거울(Miroir de justice), 그리고 계약의 궤(Arche d’alliance)에 해당하는 그림들을 볼 수 있으며, 정문 바로 위에는 성모 마리아의 얼굴이 커다랗게 그려졌다. 레제의 작품이 없었더라면, 육중한 돌기둥들로 가려진 이 성당의 입구는 매우 무겁고 답답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예술가의 작품이 종교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일 때, 이를 과연 그리스도교 미술 전통에 수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작품을 바라보는 신자들의 몫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페르낭 레제가 이 성당에 그린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과 종교적 울림을 경험한다면, 작가와는 상관없이 그 작품은 그리스도교 미술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레제 자신도 완성된 작품을 마주하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그가 지녔던 신념이나 개인적 성향과는 별개로,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서 성스러운 빛을 지니게 되었던 까닭이다.

조수정씨는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수정(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