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가톨릭신문이 만난 사람] ‘안나의 집’ 대표, 김하종 신부

이주연 편집부장 (miki@catimes.kr),사진 서상덕 기자
입력일 2014-07-29 수정일 2014-07-29 발행일 2014-08-03 제 2906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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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 섬기는 봉사
아름다운 ‘선물’이며 ‘영광’
저녁 무료급식소 ‘안나의 집’ 운영
현재까지 128만 노숙자 식사 제공
후원 의지해야 하는 어려움 딛고
오로지 가난한 이 희망 주고자 매진 
희망·사랑 나눈 공로로 ‘호암상’ 수상
위기 청소년 돕기 프로그램도 진행
1990년 한국에 온 이후로 늘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온 김하종 신부.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봉사는 의무가 아닌 선물이며 영광이라고 밝혔다.
2년여 전 어느 겨울날 오후, 경기도 성남시 모란시장 인근 무료급식소 ‘안나의 집’ 문 앞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서성거렸다. 급식을 준비 중이던 김하종 신부(빈첸시오 보르도·56·오블라띠 선교수도회)가 “어떻게 오셨냐”고 말을 건네니, “배가 고파서 왔다”고 했다. 한 달 동안 거리를 헤맸다는 그녀. 김 신부는 끼니부터 해결하도록 한 후, 상담을 거쳐 그가 머물 수 있는 쉼터를 물색해 안내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후 그녀가 김 신부를 찾아와 봉투를 내밀었다. 쉼터를 통해 일자리를 찾았다고 했다. “그날 신부님과 만나지 못했다면, 너무 배가 고파 성매매라도 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이제는 새 삶을 살게 됐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써 달라”는 부탁이 이어졌다. 김 신부는 이 봉투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안나의 집 운영이 힘들고 어려워도 결코 열 수 없는 봉투다.

밥, 희망, 사랑

안나의 집은 전국 최초의 저녁 무료급식소다. 오후 4시30분부터 7시까지 노인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통상 550여 명의 밥이 준비된다. 지난 2011년, 무료급식 제공 100만 명을 돌파했다. 2013년 현재 안나의 집에서 밥을 나눈 총 인원은 128만9445명. 각 분야별 봉사자 수는 7241명에 달한다. 모든 재정은 후원금으로만 충당된다. 이곳에서는 밥을 나누는 것과 함께 의료(내과, 치과, 정신과, 수지침, 통증클리닉), 상담(실업, 법률, 심리), 교육(인문학, 알코올 건강), 자활 프로그램 등이 병행된다. 그야말로 노숙인들이 육신의 배를 채울 뿐 아니라 자립하는데 필요한 기초적인 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

김하종 신부는 지난 5월 30일 ‘한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호암상 제24회 시상식에서 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국내 심사위원회 및 해외 석학 자문단 평가를 거쳐 선정된 결과다.

1993년 안나의 집 설립 이후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을 실시하는 한편 청소년들을 위한 쉼터와 자립관 운영 등으로 사회 안에 단순히 ‘밥’ 뿐만 아니라 희망과 사랑을 나눈 공로였다.

김 신부를 찾았던 날, 김 신부는 앞치마 차림으로 봉사자들과 함께 삼계탕을 만들고 있었다. 초복을 하루 앞두고 안나의 집을 찾는 이들에게 삼계탕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식당 옆방에서는 이발 봉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입구에서는 마침 판교중학교 관현악반 학생들이 ‘아리랑’을 비롯 귀에 익은 클래식을 연주하며 손님들에게 음악 봉사를 하고 있었다. 각각의 자리에서 맡은 몫을 다하는 봉사자들의 손길, 움직임은 친절하면서도 일사불란했다.

이곳 봉사자들에게 강조되는 나눔의 정신이 있다. “가난한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봉사는 의무가 아니라 아름다운 선물이며 빛나는 영광이라는 것.” 이유는 그들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기쁨, 평화, 용서를 주셨지만 여전히 당신 몸에는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그 상처가 바로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아픈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희생, 봉사 하는 것은 고통 받는 사람뿐 아니라 예수님의 상처를 감싸고 치료해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안나의 집 영성입니다.”

한 해 400여 명에 이르는 노숙인들이 길거리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현실. ‘노숙인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김 신부는 “대부분 어려서 사랑, 관심,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성장 후에도 정신적·심리적으로 상처가 많아 제대로 된 생활이 어려운 이들”이라며 “진심어린 애정과 관심으로 노숙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의미를 찾고, 사회 일원으로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안나의 집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노숙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곳이 되고자 한다.

‘한국’과의 만남

김 신부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 오블라띠 선교수도회 소속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사제로서의 삶을 결심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학교를 졸업할 즈음 ‘성소’를 느꼈고 ‘너무 행복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교구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방학 동안 봉사활동을 통해 경험한 가난한 사람들 모습은 또 다른 성소를 결정짓게 했다. “선교사로써 다른 나라에 가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정신을 지닌 오블라띠 수도회에 입회한 김 신부는 1987년 사제품을 받고 이탈리아 국내사목과 아프리카 세네갈 선교활동에 이어 한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름도 지었다. ‘김대건 신부’의 성을 붙이고, 하느님의 종으로 살고 싶다는 뜻에서 ‘하종’이라 했다.

김 신부는 원래 동양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학생 시절, 인도의 간디에 관한 책을 접한 후 타고르, 부처, 동양철학, 인도철학, 유교를 접했다. 수도회 생활을 하면서 ‘라오스의 역사’를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한국생활을 시작하며 그는 가장 가난한 곳을 물색했다. 그때 알게 된 곳이 성남 지역이었다. 당시 달동네가 존재하고 있었다. 김 신부는 성남 신흥동본당 보좌신부로 2년간 활동하면서 지역 사회복지 담당 수녀들을 쫓아 병원, 독거노인 가정 등 도움이 필요한 곳들을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김 신부는 성남시 수정구 위탁을 받아 독거노인 급식을 위한 ‘평화의 집’을 운영했고, 청소년들 공부를 위한 ‘목련마을 청소년 나눔 교실’을 열기도 했다. 자선 식당 운영과 무료음식 배달 등 활동도 이어졌다.

‘안나의 집’

‘안나의 집’이 시작된 것은 IMF 여파로 한국사회 전체가 휘청거렸던 1998년이었다. 170만이 넘는 실업자들이 발생했고, 거리에는 노숙자들이 증가했던 시기였다.

식당을 운영하던 오승철(마태오)씨가 공간을 제공하면서 무료 급식소를 제안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처음에는 일주일 한번 밥이 나눠졌지만, 일주일 ‘두 번’에서 ‘세 번’, ‘네 번’으로 점점 횟수가 늘어났다. 찾아오는 이들 숫자도 불어났다. 이후 급식소는 성남동성당으로 옮겨졌고, 오승철씨 모친 이름을 따서 ‘안나의 집’이 됐다. 2006년 사회복지법인 설립과 함께 2008년에는 식당과 사무실, 각종 시설을 갖춘 현 건물이 완공됐다.

노숙인 지원 외에 안나의 집을 통해 김 신부가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청소년’이다. 현재 위기 청소년을 위한 단기시설과 쉼터, 그룹홈, 자립관 등 4단계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40명 정도의 청소년을 돌보고 있다.

“노숙인들이 급식소에 가출 청소년들을 한 명, 두 명씩 데려왔어요. 처음에는 그들에게 밥을 줄 수 있다는 게 기뻤는데, 갈 곳 없는 그들에게 ‘잘 가’라고 인사하는 것이 슬펐어요.”

김 신부는 무작정 방을 얻어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보살피기 시작했고, 공부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쉼터, 그룹홈 등을 만들어 규모를 늘려갔다. 그는 매일 안나의 집 일정을 마치고 청소년들을 만나러 간다. 하루 일과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 청소년들과의 만남은 많은 활동 중에서 가장 큰 보람과 기쁨이라고 했다.

김 신부는 여전히 수많은 청소년들이 길에서 헤매고 있는 현실이 맘에 걸린다. 그래서 앞으로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안나의 집을 찾는 이들에게 복날 삼계탕을 준비한 김하종 신부.

난독증

김 신부 이야기를 하자면, ‘난독증’을 빼놓을 수 없다. 어려서부터 난독증을 앓았던 그는 이로 인한 학습장애와 열등감으로 청소년기를 힘들게 보냈다. 그는 이를 ‘기회’라고 한다. 그런 체험이 있었기에 ‘고통’과 어려움 속에 사는 이들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고통은 결국 하느님이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려고 주신 은총이라고 봅니다. ‘벌’이 아니예요. 새로운 시작을 주는 계기입니다.”

한국에서 난독증을 알리는 일은 그에게 또 하나의 ‘미션’과 같다. 2003년 ‘난독증 알리기 본부’를 창립했고, 각종 관련 홍보와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뼈를 묻을 곳, 한국

언젠가, 안나의 집을 운영하면서 김 신부가 아주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봉사자들은 부족했고 음식 재료를 기증 받는 일도 쉽지 않았다. 가지고 있는 돈도 없었다. 정말 너무 기운 빠지는 나날이었다.

그 어느날 저녁 숙소 경당에서 김 신부는 감실을 향해 ‘반말’로 예수님께 협박을 가했다. “도와주지 않으면 안나의 집 문 닫고 이탈리아로 돌아가 버릴 거야.”

“이상하게도 그 이후 안나의 집 상황은 점점 더 좋아졌다”고 웃으며 말하는 김 신부에게서 지난 16년 동안의 여러 마음고생이 느껴졌다.

전적으로 후원에 의지하는 안나의 집 운영은 늘 모자란 듯 보이지만 부족하지 않게 지나간다. 김 신부는 신혼여행 비용을 아껴 운영에 보태달라고 찾아온 젊은 부부의 모습, 또 평소 식사를 하러 왔던 노숙인들이 ‘희망’을 갖게 했다는 의미에서 어버이날 포도주 한 병과 작은 성금을 들고 찾아온 순간 등을 얘기하며 “안나의 집 자체가 기적”이라고 했다.

“어떤 큰 놀라운 기적보다, 안나의 집에서는 매일매일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순간들 속에서 예수님을 자주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매일 잠자리에서 드리는 기도는 하느님이 베푸신 엄청난 선물들에 대해서다.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이들이 무탈한 것에 대해, 기대하지도 않았던 쌀자루들을 통해, 주님 당신을 찬미합니다.” 선교사로서 느끼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자신의 삶을 통해 매일 완성하시는 놀라운 현실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선교사로서의 체험은 “단지 하느님께서 매 순간 주신 사랑과 그분의 기적과 징표들을 증거 할 뿐”이라는 김 신부. 그 증거는 “먼저 회심한 후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고향 이탈리아에서 지낸 세월보다 한국 ‘성남’에서의 시간이 더 오래됐다는 김 신부는 이미 장기기증과 시신기증을 마쳤다. 그만큼 한국은 그야말로 이제 ‘뼈를 묻을 곳’이다.

호암상 수상을 통해 김 신부가 남긴 말이 있다. “외로운 노인에게 희망을 주고, 어려운 청소년에게 배움을 주고, 배고픈 이웃에게 음식을 나누는 삶을 세상에서는 ‘봉사’, ‘헌신’이라고 하지만, 나는 늘 ‘감사의 마음으로 살 뿐’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큰 기적보다는 작은 사랑이라는 삶의 지혜를 전하고 싶습니다.”

■ 김하종 신부는…

- 이탈리아 피안사노 출생(1957)

- 교황청립 우르바노대 학사(1981)

- 로마 그레고리안대 동양철학 석사(1987)

- 사제 서품(1987)

- 한국 입국(1990)

- 빈민사목(영세민·장애인)(1992~1995)

- 평화의 집(독거노인 무료급식소) 운영(1993~1998)

- 사회복지법인 안나의 집 대표(1998~현재)

이주연 편집부장 (miki@catimes.kr),사진 서상덕 기자 (sa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