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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세월호 참사에서 시대의 징표 읽어야 / 강우일 주교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
입력일 2014-05-21 수정일 2014-05-21 발행일 2014-05-25 제 2896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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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는 경향잡지 6월호에 기고한 ‘세월호 참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성찰’에서 “그리스도인의 시각에서 세월호 사건을 조명하고, 이 재앙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시대의 징표는 무엇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번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일지 진지하게 고뇌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음은 기고 요약이다.

세월호 참사는 가슴 아픈 재앙이고, 모두가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가적 범죄다. 애도를 표하는 것으로 만족할 일이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월호 비극에 대한 국민의 슬픔과 무력감이 울화와 분노로 바뀌어가는 것 같다. 침몰하기까지, 희생자 수색 과정에서 드러난 행정 당국의 무질서와 무책임과 무능력이 상상을 초월하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희생자 유족들이 “이런 국가가 국가인가, 이민을 떠나겠다” 하며 토로하겠는가.

학생들은 아무런 자기 탓 없이 사고를 당했다. 이들의 죽음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죄 없는 아이들의 죽음은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 일어났던 무참한 학살을 연상하게 한다.

무구한 젖먹이들의 죽음은 불의가 세상을 지배하는 역사의 오랜 부조리가 반복된 또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라는 시야에서는, 젖먹이들의 죽음은 예수의 첫 동료 순교자들의 제사였다. 모든 이의 죄를 기워 갚기 위한 속량의 제물로 자신을 십자가에 봉헌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에 자신의 목숨을 함께 제물로 바치는 티 없는 어린이들의 합동 제사였다.

진도 앞바다에서 수장당한 희생자들 모두 베들레헴의 젖먹이들처럼 무력하게 유린당했다. 관피아들과 공조 체제를 이루며 불의와 비리를 양산해 온 사업가들, 규제를 완화하며 이러한 세력을 대대로 양산해 온 국가 지도층이 이 아이들을 바다 속으로 쓸어넣었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라 그러한 불의와 비리의 관행과 일상화를 묵인한 우리 시민들 모두가 공모자다.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악을 수용하고 협조하는 죄다. 죄 없는 아이들의 목숨은 이런 우리 모두의 방조와 무관심이 저지른 죄를 밝히기 위해 필요했던 속량의 제물이 아니었을까? 베들레헴 젖먹이 엄마들의 비탄과 예언자 예레미야의 외침 속에 팽목항 유족들의 울부짖음이 공명이 되어 들려온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이제 우리는 이 사회의 관행이 되고 일상화된 불의와 비리의 고리를 파쇄하기 위해 우리 각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야 한다. 진실이 묵살당하고 정의가 억압당할 때 침묵과 외면으로 비켜가는 무책임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통곡소리가 들릴 때 못 들은 척하고 귀를 닫지 말아야 한다. 보기에 끔찍한 광경이 벌어질 때 눈을 돌려 못 본 척하고 지나치지 말고 멈춰 서야 한다. 그리고 다가가야 한다.

국가기관이 개입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정당화되거나 용납될 수는 없다. 국가 공권력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 속에는 국가의 이름으로 고귀한 인권이 무참히 유린당한 사례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몇십 년이 지난 후 사법부가 무죄라고 판결하고 보상금이 지급된다 하여도 구겨지고 짓밟힌 인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2008년 이후 밀양 농민들은 고압 송전탑 건설을 반대해 오다가 두 명이 자살하고 한 명이 자살을 기도했다. 이 송전탑은 신고리 3호기 핵발전소의 완공을 앞두고 거기서 생산되는 전기를 송전하기 위한 탑들이다. 그런데 그동안 이 원전들을 운영하고 감독하는 고위 공무원과 관계자들이 뇌물을 받고 불량부품 납품과 문서 위조를 눈감아주어 무려 97명이 검찰에 기소되는 대규모 원전비리 사건이 터졌다. 이런 비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운영되는 우리 원전들은 끊임없이 고장과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이 원전들에 후쿠시마형 사고가 터지면 세월호 사고와는 비교도 안 될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밀양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목숨을 바쳐 울부짖어온 것은 사실은 그들 개인의 땅 문제만이 아니라 가공할 방사능 재앙에 대해 우리 온 국민에게 던지는 예언적 경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자렛 노동자 가정에서 가난하게 사신 것은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 이방인과 세리, 죄인과 창녀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겪는 좌절과 실망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그들에게 해방과 위로를 주시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성전 안에 조용히 머물러계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유다, 사마리아, 갈릴래아뿐만 아니라 이방인 마을도 찾아가시고, 농부와 어부, 목자와 노동자들 곁으로 다가가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고 하시며 세상 한복판에 들어가셨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려면 오늘 눈물짓고 고통 받는 이들, 오늘의 가장 작은 이들 곁으로 다가서고 그들의 아픔과 한을 공유해야 한다. 이들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번영과 성장을 추구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그 주체가 국가 권력이라고 해도 “아니요!”라고 거부하는 저항의 연대를 만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외면하고, 그들의 고통과 외로움에 무관심한 이들에게는, 영원한 불이 준비되어 있다고 경고하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