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성찬경의 반투명 인생노트 (43) 마음이 가난한 사람

성찬경 (시인·예술원 회원)
입력일 2012-03-06 수정일 2012-03-06 발행일 2012-03-11 제 2786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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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이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진복팔단(眞福八端)을 여시는 첫 구절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들으면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에 사로잡힌다. 깊이 모를 위안을 받는다. 그리고 삶에서 의욕을 되찾는다.

과장 없이 말해서 나는 이 한 구절 얻은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다고 느낀다. 아니, 이 한 구절 얻기 위해서라면 나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겠다. 이것은 나의 실감이며 진실이다.

나는 오래 전에도 이런 뜻으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랬더니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여류 소설가 한 분이 TV의 대담에 나와서 “어떤 분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이 구절을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는데, 나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가난’이 뭐 그렇게 좋은 것입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서, 나는 “하하아, 저 분이 내 글을 읽은 모양이로구나!” 하고 느꼈다.

그분의 말도 틀린 생각은 아니다. 나를 포함해서 세상에 가난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가난의 슬픔과 고통을 모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사람들이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해나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상황은 다르다. 많은 사상가, 혁명가, 정치가들이 평등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몇 천년 동안 필사적인 노력을 해왔다. 그런데 세상엔 부자가 많은가, 가난한 사람이 많은가. 여전히 가난한 사람이 압도적으로 다수다. 가난한 이들이 변함없이 역사의 흐름의 주류다. 그러니만큼 우리는 가난의 본질을 깊이 들여다보고 묵상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이 구절을 좋아하는 첫째 이유는 이 구절이 ‘약자의 철학’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약자의 철학이야말로 내가 나의 온 생애를 지탱해 올 수 있었던 나의 기본원리이다. 나는 ‘약자의 철학’의 신봉자다.

나도 한때 강자의 철학을 꿈꾸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일찌감치 이런 생각을 접었다. 강자의 자세를 갖는 것은 나의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일뿐만 아니라 사람의 입장에서 ‘강자의 철학’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나는 철저하게 약자로 살아나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사실 진복팔단도 온전히 약자를 옹호하는 입장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약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는 바로 이런 약자들이다. 가만히 보면 기세 좋게 강자처럼 세상을 치고 나가는 사람은 그러한 위세가 오래 지속되질 못한다. 때가 되면 부러지고 거꾸러져서 퇴장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강자의 철학은 참된 의미에서 사려 깊은 생각도 아니며 진리의 편도 아니다.

반면에 굴욕을 참아가며 슬퍼하며 인내하는 약자는 끝까지 살아남아 햇빛을 본다. 진리가 약자의 편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한 이를 위로하는 그리스도교의 사상은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사상과도 맥이 통한다. 물은 장애물이 나타나면 애써 싸우려하지 않고 말없이 고이고 고여 이윽고 때가 되면 넘쳐흐를 뿐이다. 물은 순수하게 약자의 자세다. 하나 세상에 물을 이길 강자는 없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무리하지 말고 참아가며 때를 기다려가며 늘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도 현명한 삶의 길이라 여겨진다.

공자도 결연하게 진리를 갈파(喝破)하신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의 구절이 갖는 매혹과 뜻의 향기는 다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구절을 나의 목숨과도 바꾸겠다고 하는 것 아닌가.

성찬경 (시인·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