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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경의 반투명 인생노트 (42) 엔도 슈사쿠의 경우

성찬경 (시인·예술원 회원)
입력일 2012-02-28 수정일 2012-02-28 발행일 2012-03-04 제 2785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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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전개의 달인 ‘엔도’ 시니컬하면서 복잡한 작가다
천주교 교우로서 웬만큼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엔도 슈사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엔도가 더러 화제에 오르는 것은 일본 작가 중에 가톨릭 작가라 할 만한 사람이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엔도 슈사쿠(1923∼1996)는 11세 때 천주교의 영세를 받았고 일본 가톨릭 계통의 학교를 거쳐 게이오대학교(慶應大)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시종해서 일본의 정신풍토와 천주교와의 모순적인 문제를 추구했다.

천주교 작가라 아니할 수는 없지만 믿음에 따를 수 있는 회의(懷疑)와 갈등을 교묘히 부각시키는 작가이기도 하며, 이 점이 바로 그의 소설이 색다른 재미를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선 그에 대해서 생각나는 것은 그는 예수의 아름다운 사랑의 정신에 깊이 매료되어 순수한 흠모의 정(情)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은 완전히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해 부근에서」의 어떤 장면에서 한 딱한 병자가 예수에게 기적을 청할 때 예수가 할 수 있는 말은 자기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전연 없고, 다만 아파하는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끝까지 나눌 수가 있을 따름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말하자면 고통의 ‘무한 분담’인데 이것만으로는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지만, 수수한 ‘믿음’ 위에 세워진 신앙의 자세와는 같을 수가 없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차원의 ‘예수’의 상(像)이다.

기적을 단순 소박하게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예수가 죽을 육신을 지닌 라자로와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의 죽음의 숙명을 슬퍼하시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자비를 청하신 다음 ‘나자로야 살아서 나오너라’ 하셨을 때 나자로가 벌떡 일어나서 나오지 않는다면 예수의 ‘꼴’은 무엇이 되는가. 한낱 허풍떠는 사기꾼으로 전락할 뿐이다. 이 장면에서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믿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권위를 지닌다.

「사해 부근에서」에서 엔도는 우리에게 놀라운 장면을 보여준다. 종교의 높은 직위에 있는 대사제 안나스는 예수를 회유하려는 자리에서 자기(안나스)는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척하는 기술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서 하느님은 영원한 신기루 같은 것이라고 덧 붙인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다. 표면상으로는 위선자 안나스의 솔직 대담한 고백이지만 따지고 보면 일부 가톨릭 신자의 마음 구석에 숨어 있는, 물론 작가 엔도의 마음에도 알찐거리는 심리와 맥이 통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런 글을 읽고 공감과 쾌감을 느끼는 독자 또한 많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엔도는 소설 「침묵」에서 배교자의 심리를 다룬다. 덕망 높은 포르투갈의 크리스토반 페레일라가 17세기 일본에서 배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포르투갈의 열렬한 젊은 사제 세바스티안 로드리고는 일본으로 건너간다. 자기야말로 신앙을 증거해 보이겠다는 결심하에서다. 그러나 결국 그도 배교하고 만다.

배교를 끌어내는 장치는 잔인하고 교묘하다.

‘배교하면 붙잡힌 천주교도 여러 사람을 살려 주겠다, 그러나 배교하지 않으면 이들을 모두 거꾸로 매달아 죽이겠다.’

이것이다. 배교만 하면 교우 여러 명을 살리는 자비행이 되고, 본인이 순교를 고집하면 여러 명이 무참히 죽을 수밖에 없다….

배교의 구실이 이렇게 미화돼 있다. 이런 장치를 고안해낸 일본의 지방 현감 이노우에(井上)는 (그 자신도 배교자다) 이렇게 말한다. “어떠한 종교도 일본에 오기만하면 그 뿌리가 견디지 못하고 썩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사상은 일본의 국수주의와도 맥이 통하는 바가 있다.

극적인 서스펜스의 연속으로 플로트를 끌고 가는 소설의 달인 엔도. 그러나 엔도는 시니컬하면서 복잡한 작가다.

성찬경 (시인·예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