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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경의 반투명 인생노트 (41) 와신상담

성찬경 (시인·예술원 회원)
입력일 2012-02-21 수정일 2012-02-21 발행일 2012-02-26 제 2784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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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원한을 사랑으로 갚고 복수하려는 생각은 금물(禁物)이다
TV 방영물 중에서 연속극이 대단한 인기가 있다는 것은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여로」, 「대장금」, 「불멸의 이순신」, 「제빵왕 김탁구」,「우리집 여자들」 등 나같이 연속극에 비교적 냉담한 사람도 연속극 제목을 여럿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연속극에 사로잡히는 것이 싫어서 처음부터 보는 것은 아닌데도 어느 틈엔가 극의 스토리를 대충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결국 연속극의 ‘포로’가 된다.

얼마 전에 내가 푹 빠져서 열심히 본 연속극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인데 이 극은 케이블 TV에서만 방영되었고, 중국산이다.

이 극을 보는 동안에 알게 된 일이다. ‘와신상담’의 고사(故事)는 한 사람의 소행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가 않고 ‘와신(臥薪)’ 곧 나뭇가지를 깔고 자는 일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한 고행이며, ‘상담(嘗膽)’ 곧 쓴 쓸개를 핥는 일은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한 고행으로 설명이 돼 있다. 오왕 부차는 부왕 합려가 월왕 구천에 패한 것에 대해서 복수를 다짐하기 위해 그렇게 했으며, 일이 돌고 돌아 이번에는 오왕 부차에게 패한데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뜻으로 월왕 구천이 그렇게 한 행위라고 사전(辭典)에 설명이 돼 있다. 그런가하면 ‘와신상담’은 월왕 구천 한 사람이 한 소행으로 설명해놓은 사전도 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이런 혼동을 바로잡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TV 연속극을 재미있게 보는 일과 관련하여 나는 두 가지 사항(事項)을 생각한다. 첫째는 삶을 담는 우리의 의식구조가 현실과 상상(허구)의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는 한 편으로는 우리 실지의 삶을 기억하고 또 한편으로는 상상의 삶을 떠올리며 이 둘을 때로는 조화롭게, 때로는 대립적으로 엮어나가면서 복잡하고도 미묘한 심리놀이를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흔히 말하는 ‘대리만족’의 심리적 보상도 얻는다. 나는 이 ‘대리만족’이란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만족에도 ‘대리’가 있을 수 있는가? ‘대리만족’에는 역시 패자(敗者)의 심리의 그림자가 알찐거려 이 점도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이다.

‘대리만족’보다 더 본질적이며 차원이 높다고 여겨지는 것이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카다르시스’ 이론이다. 주인공(영웅)과 더불어 심각한 비극적 체험을 하고나면 우리의 내면세계가 무엇인가 깨끗이 정화되는 것을 느끼며 마음이 후련하고 개운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비극적 체험이 어째서 우리의 마음을 씻어주며 그것이 심미적인 쾌감으로까지 승화되는가? 당연히 이런 의문이 일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존재에 숨은, 쉽게 풀 수 없는 비밀이 아닌가 싶다.

사건이 돌고 돌아 오왕 부차가 승리하여 월왕 구천과 그 왕후 신하들을 끌고 간다. 이제 모두가 오왕 부차의 노예다.

중국산 연속극 「와신상담」을 보면서, 나의 생각으로는 아마 거의 예외 없이 모든 관객들은 자기의 처지가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 둘 중 어느 쪽인 가를 판단 했을 것이다. 한쪽에 대해서는 동정과 공감을, 또 한쪽에 대해서는 비분과 반감을 가지고 극을 좇아갔을 것이다.

한쪽은 허영과 교만에 찬 잔인한 승자다. 또 한쪽은 비참한 패자다. 여러분의 처지는 어느 쪽인가? 답은 뻔하다. ‘내 처지는 승자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고 ‘나는 저 패자 구천의 처지와 같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의로운 패자’ 쪽이 어느모로 보나 더 매력적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패자 구천의 끝도 없는 인내의 능력에서 배우는 바가 정말 크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다. 따라서 우리 교우는 원한은 사랑으로 갚아야하며 복수하려는 생각은 금물(禁物)이다. 하나 연속극을 보며 시원하게 복수하는 쾌감을 누리는 일마저 금물은 아니다. 나는 저 교만한 오왕 부처가 몰락하는 날을, 그리고 ‘와신상담’이 열매를 맺는 날을 기다리며 연속극 「와신상담」의 줄거리를 즐긴다.

성찬경 (시인·예술원 회원)